[매일춘추] 고요한 열정

입력 2012-06-04 07:58:06

거울 앞에 섰다. 세월이 얼굴에 서려있다. 낙엽처럼 푸석한 피부엔 생기가 없다. 이마에 잡히기 시작한 주름, 잔설이 내린 머리카락이 오늘따라 짙게 드러난다.

나는 지금 중년의 고갯마루에 서 있다. 나이 듦, 이 만큼 당연한 것도 없겠지만, 이 만큼 무자비하게 엄습하여 당혹스럽게 하는 것도 없는 듯하다. 거울 앞에서 깊어진 주름 한 골이라도 발견했을 때, 우리는 소스라치게 놀란다. 느끼는 바가 있다.'삶'의 반대말은'죽음'이 아니라'늙음'이라고 했던가. 그래서 사람들은 죽음보다 나이 듦에 더 두려움을 느끼는 지도 모른다.

이토록 나이에 민감한 것은 젊음을 유지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이 아닐까. 지금 이 사회는 우리에게 늙기를 금지하고, 오래도록 젊게 남으라고 세뇌를 시키고 주문을 한다. 동안(童顔)을 찾아 상까지 주는 대회도 생겼다. 주름을 펴고, 처진 곳을 당겨 올리고, 움푹 들어간 볼을 채운다. 의술의 힘으로 몸이'늙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 이런 모습이 썩 달갑지 않음은 왜일까.

여름은 뜨겁도록 찬란하고, 가을은 오색 빛으로 고요하다. 모두가 아름다운 법이다. 가는 세월에 집착해서 노년에는 중년으로, 중년에는 청년으로 거슬러가기를 고집한다면 지금 누릴 수 있는 제 아름다움은 놓쳐버리게 된다. 억지로 중년이 청년의 얼굴을 만든다면 어떨까. 시각적인 아름다움이야 얻겠지만, 젊음에 갇혀 세월의 발자취인 우아함과 기품은 표현하지 못하고 잃어버리게 된다.

나이 듦은'소멸'이 아니라'고요한 열정'으로 일구어 낸 자신의 존재를'완성'시키는 과정이 아닐까. 젊었을 땐 끓는 열정으로 살았다면, 중년과 노년의 열정은 오래토록 숙성되어 빚어지는 고요한 열정으로 산다. 나이 든다는 것은 우리를 습격하는 재앙도, 무자비한 시련도 아닌, 젊음의 연장이며 젊음보다 몇 곱절 위대한 성스러움이다.

세계보건기구가 '장수지역'으로 일본의 오키나와 섬을 선정했다. 이들의 장수비결은 무엇을 먹고, 무엇을 마시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늙는 것을 행복으로 받아들이는 낙천적인 마음의 태도였다고 한다. 그들이 매일 아침 부르는 노래의 후렴구 '마음이 뜨거우면 몸이 녹슬지 않는다'가 이를 증명해준다. 이 뜨거움은 혈기왕성한 청년의 열정이라기보다 조용한 열정이었던 것 같다.

갑자기 미안해진다. 지금 이 지면을 대하는 독자들에게 한 가지고 고백할 것이 있다. 신문에 당당히 나붙은 필자의 사진은 7년 전의 모습이다. 내 실물은 사진보다 7년이나 더 늙은 셈이다. 이것도 가는 세월에 대한 '집착증'일까. 본의 아니게 독자들을 혼란케 한 듯하여 미안할 따름이다.

다시 거울 앞에 선다. 머리는 희끗희끗하고 잔주름은 여러 갈래 길을 보여준다. 그 속에 묻혀 있는 내 나이가 제법 멋스러워 보인다. 이만하면 무리하지 않고 세월의 결을 따라 제대로 나이 들어가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이 상 렬 수필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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