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3,800여곳 돌아본 도선 국사 "여기가 진짜 수도 명당"
'절이 가장 높은 봉우리에 있으면서도 평평하고 넓게 트였으며 가야산을 정면으로 마주 보면서 봉우리의 흰 구름은 끊임없이 모였다 흩어지니 변화가 무쌍하였다. 앞문을 열어두고 종일토록 바라보아도 그 의미가 무궁하여 참으로 절경이었다. 생각 같아서는 더 머물고 싶지만 갈 길에 얽매여 뜻을 이룰 수 없음이 안타깝다. 산승들은 모두 여름 땔감을 마련하러 나갔다.' 조선 숙종 때 선비인 우담 정시한(丁時翰'1625~1707) 은 수도암(修道庵)에 머문 뒤 '산중일기'(山中日記)에서 이렇게 묘사했다. '산중일기'는 우담이 숙종 12년(1686년) 3월에 원주(原州) 집에서 나와 청주 공림사(空林寺)를 거쳐 강원'경상'전라'충청도 등의 명산과 고찰을 2년 동안 돌아보고 쓴 기행문이다. 당시 사찰(寺刹)의 모습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400년이 지난 지금도 수도암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변한 게 없다. 가람의 규모만 다소 커졌을 뿐 고즈넉하고 조용한 절의 분위기는 수행처로의 명성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옥녀직금형 명당에 자리한 수도암
초파일 즈음에 수도암을 찾았다. 스님들이 큰 법당에서 사시(巳時) 예불을 하고 있다. 조용한 가람은 목탁소리와 스님들의 염불소리로 가득하다. 선원장 스님과 만나기로 했지만 마냥 기다리기가 마뜩잖아 가람을 둘러본다. 수도암은 859년(신라 헌안왕 3년)에 도선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도선국사는 당시 이곳을 찾아 절터를 발견하고 '많은 스님이 수행할 곳'이라며 7일 동안 기뻐하며 춤을 추었다고 전한다. 그래서 이름을 수도암이라고 했다.
수도암은 김천에서 가장 높은 1,080m에 자리 잡고 있다. 풍수지리적으로 젊은 여인이 앉아서 비단을 짜는 '옥녀직금형(玉女織錦形)'의 명당으로 불린다. 멀리 보이는 가야산 정상이 실을 거는 끝게돌이 되고 동'서로 나눠 서 있는 탑이 베틀의 기둥이며 대적광전(大寂光殿) 비로자나불을 모신 자리가 여인이 앉아 베를 짜는 자리가 된다는 것이다. 관음전 앞에는 작은 연못이 있어 베틀에 필요한 물을 제공했다. 연못에 물이 가득하면 사운이 창성한다고 전한다.
"절 왼쪽으로 청룡등이 길고 힘차게 뻗어 수도암 터를 감싸고 우측으로는 백호등이 웅장하게 내려와 선방 앞에 묘한 봉우리를 만들어 절을 지켜주고 있다. 정면에는 가야산이 연꽃이 피어난 것처럼 솟아 있어 지혜와 덕을 표방했다. 이곳에서는 가야산을 연화봉이라 부른다. 연화봉 앞에는 일자봉이 있어 연화봉을 받쳐 주고 있다. "연화봉은 공덕을, 일자봉은 평등한 지혜를 나타내며 따라서 지혜와 덕을 수도암에서 현출하고 있다"는 선원장 원인 스님의 설명이다.
"지기가 잘 모여 있는 깊고 고요한 최적의 외적인 조건으로 기운이 '수성'하여 스님들이 오래도록 자지 않고 공부를 할 수 있어 발심수행에 도움이 된다. 도선국사가 전국을 돌며 3천800군데를 스님 수행처로 지정했는데 이곳이 가장 마음에 들어 7일간 춤을 췄을 정도다." 스님의 자랑이 이어졌다.
◆단아하고 깔끔한 법당에는 연등조차 걸지 않아
수도암 큰 법당은 대적광전이다. 당연히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더러움이 물들지 않은 연꽃으로 장엄한 세계)로 '진리의 빛'을 상징하는 비로자나불을 본존불(本尊佛)로 모셨다. 스님의 수행처로 연꽃모양의 가야산이 마주하는 이곳 도량과는 기막히게 맞아떨어진 조합이다. 돌로 조성된 비로자나불은 높이가 250㎝, 무릎폭 210㎝, 어깨폭 140㎝로 9세기를 대표하는 불상이다. 보물 제307호다. 비로자나불 특유의 지권인(智拳印'왼손 집게손가락을 오른손으로 감싸고 오른손 엄지손가락으로 왼손 집게손가락을 누르고 있는 형태로 이는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라는 뜻)을 취하고 있다. 통상 불상 뒤로는 광배가 있는데 여기 불상에는 광배가 없다. 제작 당시부터 만들지 않았는지 아니면 뒤에 망실된 것인지 알 수 없다. 일설에는 과거에 불상이 땀을 흘려 어깨부위가 늘 젖어 있고 푸르게 보였다고 하는데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
'산중일기'에는 "절에 들어가는 입구에 석불이 앉았는데 소박하고 진실히 절을 지키고 있으며 또한 교묘하기만 하다. 이보다 더 큰 석불을 보지 못했고 그 모습도 엄연하고 비범하다. 대석에 새긴 조각 역시 기묘하기만 하다"고 적고 있다. "예전에는 석조불상을 모신 전각이 없었다. 부처님이 바깥에서 눈'비를 맞고 있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전각을 세웠을 것"이라는 선원장 스님의 설명이다.
경주 석굴암은 인조 석굴을 만들어 불상을 모셨지만 법당에 석조불상을 모신 곳은 흔치 않아 의미를 더한다.
법당 안은 여느 절 법당처럼 닫집'불단 문양 등 화려한 조각들로 꾸며져 있지 않고 무척 단아하고 깔끔한 모습이다. 스님들이 수행하는 암자라 그런 모양이다. 더구나 부처님 오신 날이 코앞인데 흔한 연등 하나 볼 수 없다. 선원장 스님은 "이곳은 스님이 수행하는 곳이다. 법당에 연등을 달아놓으면 지저분해 보이고 남의 이름표 밑에서 스님들이 기도를 하면 산만하고 옳은 공부가 되겠느냐"고 했다. 이어 "등을 달아 천장을 가리면 기운이 탁해지고 수행에 방해가 될 것 같아 달지 않는다. 초파일에 하루만 불자들을 생각해 연등을 달아 부처님 오신 날을 축원할 뿐이다"며 수행도량으로의 자긍심을 밝혔다. 법당을 나오니 날씨가 청명해져 연꽃모양의 가야산이 더욱 눈앞에 다가온 듯하다,
법당을 지탱하는 배흘림기둥은 모양이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과 많이 닮았다. "대부분의 법당에는 다포가 앞쪽에만 조성됐는데 수도암 큰 법당은 옆 부분에 화려한 다포가 나란히 달려 있다. 전각이 전체적으로 수수하고 소박한데 법당 옆 지붕 아래에 화려한 다포가 조성돼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스님의 말이다.
◆천년의 향기를 간직한 탑과 불상'전각들
대적광전 옆으로 약광전(藥光殿)이 있다. 보물 제296호인 석조약사여래좌상을 모셔두고 있다. 불상 양식으로 볼 때 10세기경 고려 초에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수도암 약사여래는 직지사 삼성암 약사여래, 금오산 약사암 약사여래와 함께 '삼 형제'로 불린다. 모두 한 석공이 제작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한 석불이 하품하면 다른 불상도 따라서 하품을 한다는 얘기가 전한다. 특히 수도암 약사전에서 기도한 후 법당 안이나 주위 마당에서 한약냄새를 맡으면 어떤 불치병도 낫는다는 말이 있다.
대적광전과 약사전 앞에는 동'서로 3층 석탑이 우뚝 서 있다. 통일신라 탑 양식으로 수도암 창건 당시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보물 제297호다. 동쪽의 탑은 단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부를 형성하였고 그 하부에는 지대석 위에 넓은 판석을 배치한 것이 특이하다. 1층 탑신에는 사방에 감실을 마련하고 그 내부에는 연화대 위에 여래좌상을 1구씩 배치했다. 탑 높이는 376㎝로 상부에는 노반과 복발, 보륜의 일부가 남아 있다. 서탑은 동탑과 같은 양식이나 세부 기법에서 차이가 있는데 1층 탑신 사방에 동탑처럼 감실을 형성하지 않고 부조상으로 처리했다. 높이가 425㎝이며 상부에 노반과 보주가 남아 있다. 동탑과 서탑은 큰 법당과는 대칭이 이뤄지지 않는 등 어긋나 있다. 또 조성 기법도 차이가 있어 한 쌍의 탑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다. 삼층석탑 사이에는 석등과 창주도선국사(創主道詵國師)라고 새겨진 돌기둥이 있다. 큰 법당에서 개울을 건너면 나한전(羅漢殿)이 있다. 모셔진 나한이 신통력을 부려 영험의 기적을 나타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법전(法傳) 스님이 1969년 중수했다. 절 입구에 자리한 해우소(解憂所)는 톱밥을 사용, 친환경적으로 관리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글'박용우기자 ywpark@msnet.co.kr 사진'서하복작가 texcafe@hanmail.net
댓글 많은 뉴스
이재명 90% 득표율에 "완전히 이재명당 전락" 국힘 맹비난
권영세 "이재명 압도적 득표율, 독재국가 선거 떠올라"
이재명 "TK 2차전지·바이오 육성…신공항·울릉공항 조속 추진"
대법원, 이재명 '선거법 위반' 사건 전원합의체 회부…노태악 회피신청
한덕수 "24일 오후 9시, 한미 2+2 통상협의…초당적 협의 부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