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수의 시와 함께] 흑판-정재학

입력 2012-05-31 07:51:56

수업 중 판서를 하다가 갑자기 뭔가 물컹하더니 손이 칠판 속으로 들어가 버린다. 몸의 절반이 들어갔을 때 "선생님! 새가 유리에 부딪혀 떨어졌어요!"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뒤돌아보고 싶었으나 몸을 움직일 수 없었고 물에 빠지듯 흑판에 빨려 들어갔다. 칠판 속으로 들어가니 반대편 교실에서 중학교 교복을 입고 앉아 있는 내 모습이 보였다. 나는 짝과 떠들다가 생물 선생님에게 걸려서 철 필통으로 뺨을 맞았다. 맞을 때마다 샤프가 흔들려 덜그럭거렸다. 아이들이 웃었다. 뺨보다 그 쇳소리가 더 아파왔다. 나는 자리로 돌아가 교문 밖의 고양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이들이 "종속과목강문계!"를 외치는 소리를 들으며 다시 칠판을 건너오자 교실에 아이들은 없고 유리창 여기저기 검붉은 핏자국만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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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과 잔혹을 버무려 현실 문제를 낯설게 제기하는 '잔혹시', 혹은 '느와르시'(필자의 용어)를 발표하는 정재학 시인의 작품입니다. 이번에는 흑판을 통해 교육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수업 중에 선생님이 빨려 들어가는 흑판이란 무엇일까요. 교실에 있는 이들이 기댈 단단한 신념을 제공하지 못하는 무기력한 교육 방향은 아닐까요. 칠판을 통해 연결되어 있는 환상적 공간은, 폭력과 단순암기만이 지배하는 과거의 교실이나 이상을 꿈꾸는 새들을 고통스럽게 가두는 오늘의 교실이나 마찬가지라는 뜻이겠지요.

이런 잔혹한 환상이 불편하신가요? 어떤 온건한 문제 제기도 삼켜버리는 무시무시한 심연 같은 우리 사회에 이런 발언의 존재이유를 부정할 수만은 없겠지요. 모든 발언이 그 사회의 요구를 반영한 것이라면 이 역시 외면할 수 없는 우리의 발언이 아닐까요.

시인·경북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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