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幹 숨을 고르다-황악] <21> 화사하게 치장한 대간길

입력 2012-05-18 07:36:20

5월 질마재엔 야생화 물결, 바람재 산허리엔 진달래 카펫

황악산에는 이름처럼 활엽수인 참나무가 많이 서식하고 있다. 산을 덮고 있는 상수리, 굴참, 신갈, 떡갈, 갈참, 졸참 등 참나무 6형제에도 새 잎이 돋아 산꾼들에게 그늘을 제공한다.
황악산에는 이름처럼 활엽수인 참나무가 많이 서식하고 있다. 산을 덮고 있는 상수리, 굴참, 신갈, 떡갈, 갈참, 졸참 등 참나무 6형제에도 새 잎이 돋아 산꾼들에게 그늘을 제공한다.
홀아비꽃대, 병꽃나무, 둥글레(위부터).
홀아비꽃대, 병꽃나무, 둥글레(위부터).

5월이면 금수강산은 초록 옷으로 갈아입는다. 백두대간 황악산도 지금 화사한 옷으로 단장을 했다. 아름다운 5월의 신부 모습이다. 요즘 신부를 맞으러 가는 산꾼들은 마냥 즐겁고 들뜬 마음이다. 산을 찾으면서 항상 목마름이 있었다. 산은 기화이초(奇花異草)로 각양각색 아름다움을 뽐내지만 이를 제대로 감상할 수 없어 마음 한편엔 아쉬움이 남았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느낀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로 문화재에 대한 전 국민의 안목을 높인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한 말이다. 더 많은 것을 보고 느끼기 위해 이날 산행은 숲해설사 이동욱(50) 씨와 동행했다 .

◆푸른 산길에는 야생화가 잔치를

황악산이 마련한 성찬을 즐기기 위해 질매재에서 비로봉으로 대간(大幹) 길을 오르기로 한다. 길이 아름답고 야생화도 지천으로 피어나 예전부터 눈여겨봐 둔 길이다.

질매재 고갯마루에 오르자 곳곳에 주차한 차들이 눈에 띈다. 산나물을 채취하러 온 주인을 기다리는 모양이다. 겨우내 혹한을 이겨내고 이제야 고개를 내민 나물'풀 등을 향해 사람들이 제 목숨 살자고 아귀처럼 설친다. 말 못하는 여린 초목들이 인간들을 보고 뭐라고 할까. 참 밉고 무섭겠다는 생각이다.

등산로에 접어들자 병꽃나무가 가장 먼저 반갑게 인사한다. 꽃의 모양이 병처럼 생겨 병꽃나무라 부른다. 5월에 꽃을 피운다. 처음부터 붉은 꽃이 피는 것이 붉은병꽃나무요, 꽃이 흰색으로 피었다가 붉게 변하는 것을 흰병꽃나무라고 한다. 눈앞에 자태를 뽐내는 놈은 흰병꽃나무였다. 병꽃나무 아래로 보라색 꽃들이 조롱조롱 달려 있다. 줄딸기꽃이다. 고개를 숙여 가까이 다가가니 불어오는 바람에 몸을 흔들며 눈인사를 한다. 고개를 들어 옆을 보니 얇은 껍질로 몸을 감춘 나무가 있다. 물박달나무다. 자작나무과로 곡우(穀雨)쯤이면 이 나무에서도 수액이 나온다. 껍질이 얇고 갈색이어서 마치 재생노트 종잇장 같다. 얇은 껍질을 여러 겹 겹치고 추위를 견딘다고 한다. 그동안 산을 올랐지만 그냥 스쳐 지나쳤는데 숲해설사의 설명과 함께하니 장님이 눈을 뜬 것 같다.

본격 산행길로 접어든다. 백두대간 능선 마루에 오르자 헬기장이다. 바람재 4.8㎞라는 이정표가 있다. 옆으로 스탬프 보관소가 있다. 예전에 이곳에서 새가 집을 짓고 알을 낳아 새끼를 키운 새 가족 얘기를 한 적 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안을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아무런 흔적을 찾을 수 없다.

길을 재촉하니 쪽동백나무와 물박달나무 여러 그루가 모여서 얘기꽃을 피운다. 아래에는 애기나리꽃이 눈웃음을 친다. 허리를 낮추고 눈 맞춤을 한다. 옆에 멀뚱하게 서 있던 피나무가 시샘을 한다. 자기도 봐 달라고 말이다, 피나무는 껍질이 질겨 노끈으로 즐겨 사용했다. 특히 나뭇결이 좋아 바둑판 재료로 많이 사용한다는 설명이다. 강원도 쪽에는 큰 나무가 자라고 있으나 주변을 둘러보아도 바둑판을 할 만한 아름드리 나무는 찾기 어렵다. 슈베르트의 가곡 '보리수'도 이 피나무를 두고 노래한 것이란다.

◆황악산의 터줏대감 참나무 6형제.

또 길을 오른다. 이번에 보랏빛 각시붓꽃이 눈을 유혹한다. 각시붓꽃은 우리나라 대부분의 야산에서 자라는 다년생 초본이다. 햇살이 잘 드는 양지바른 곳이면 어디서나 만나볼 수 있는 봄꽃의 대명사다. 꽃은 보라색 줄기 하나에 꽃이 한 송이씩 달린다. 이 꽃은 애달픈 사랑의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화랑 관창이 황산벌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했는데 관창에게는 무용이라는 정혼자가 있었다. 무용은 관창이 죽은 후에도 마음을 바꾸지 않고 무덤에서 슬픈 나날을 보내다 숨을 거뒀다. 사람들이 관창의 무덤 옆에 그녀를 묻어 주었는데 이듬해 보랏빛 꽃이 그녀의 무덤에서 피어났다. 각시의 모습을 닮은 꽃에 잎은 관창의 칼처럼 생겼다고 해 '각시붓꽃'으로 불렀다고 한다.

주변을 둘러보니 온통 참나무다. 황악산은 이름에 황(黃)이 들어서인지 활엽수 천국이다. 주변 산과는 사뭇 다르게 푸른 소나무를 찾기 어렵다. 특히 참나무는 이곳의 터줏대감이다. 상수리, 굴참, 신갈, 떡갈, 갈참, 졸참 등 참나무 6형제가 무리를 지어 자태를 뽐낸다.

선조임금 수라상에 도토리묵으로 올라간 '상수리', 줄기껍질로 코르크마개를 만들고 굴피집 지붕으로 쓰이는 '굴참', 짚신 안에 깔아서 '신갈', 떡을 싸는 데 쓰인 '떡갈', 나무껍질을 갈기 위해 주름이 깊게 패어 있어 '갈참', 작아서 졸병인 '졸참' 등 용도와 생김새로 구분하지만 문외한이 보기에는 그 나무가 그 나무 같다.

꽃과 나무에 취해 다다른 곳이 어느덧 삼성산이다. 봉우리에서 산 아래를 보니 수목들이 봄 햇살을 받아 더욱 초록빛을 더한다. 하지만 숲속은 지금 조용한 전쟁터다. 포성과 절규는 들리지 않지만 벌레들은 나무와 풀잎을 갉아먹고 새들이 벌레들 사냥에 쉴 틈이 없다. 봄은 이렇게 무르익어가는 모양이다.

◆진달래'연달래'수달래

한 줄기 바람이 능선을 스친다. 빼어난 풍광에 취해 줄을 놓았던 정신을 바로 하고 다시 몸을 일으킨다. 길옆에는 은방울꽃이 꽃망울을 터뜨리려 애를 쓰고 있다. 참나무 숲 그늘을 헤치고 나오자 둥굴레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한약집성방에도 머리에 소개하고 신선이 먹는 풀이란 설명이다. 뿌리를 아홉 번 쪄서 말려 차로 많이 마신다. 둥굴레차는 자주 마셨지만 실물을 보는 것은 처음이다. 지천으로 널려 있는데도 지금껏 모르고 지나쳤다. 산허리를 돌자 연달래가 꽃을 달고 마중한다. 진달래가 지면 연달아 활짝 꽃을 피워 연달래라고 부른다. 연달래는 철쪽의 이곳 방언인데 말이 정다워 더 친근감이 있다. 꽃 색깔도 산철쭉(수달래)이나 진달래보다 연한 색이다.

철쭉은 한자로 척촉(躑躅)이라 한다. 신라 성덕왕 때 어느 봄날. 강릉 태수 부임 행차에 동행하던 수로부인이 바닷가 낭떠러지에 핀 철쭉을 발견하곤 이렇게 말했다. "저 꽃을 꺾어다 줄 사람 없는가." 모두 묵묵부답인데 암소를 끌고 지나던 한 노인이 낭떠러지에 올라 꽃을 꺾어 부인에게 바쳤다. 이는 신라 향가(鄕歌) '헌화가'에 등장하는 대목이다. 그래서 꽃 이름이 '발걸음을 더디게 한다'는 뜻으로 '척촉'이라 했다.

◆봄에 취해 꽃향기와 얘기꽃에 취해

한참을 가자 숲 해설사가 자리를 지키고 서 있다. 다가가니 '산동백'을 소개한다. 해발 1,000m 황악산 중턱에 웬 동백나무인가. 그런데 남해안에 있는 동백나무와는 전혀 생김새가 다르다. 산동백은 '둥근잎생강나무'를 강원도지방에서 부르는 이름이다. 동백은 붉은 꽃을 피우는데 산동백은 이른 봄에 노란 꽃을 피운다. 단편소설 김유정의 동백꽃은 다름 아닌 산동백을 말한다. "점순이는 나를 향해 쓰러진다. 점순이에 밀려 나는 뒤에 있던 노오란 동백꽃 꽃밭으로 떨어진다. 그리고 그 향기에 젖어 정신이 알싸해진다…(중략)" 그동안 너무 몰랐다는 것에 대해 스스로 부끄러워 얼굴이 화끈하다.

물푸레나무에 대한 설명이 이어진다. 옛날에 죄인들에게 태형으로 볼기를 칠 때 곤장으로 사용한 나무가 물푸레나무다. 지금은 단단함으로 인해 야구방망이로 사용하는데 국민타자 이승엽의 야구방망이가 물푸레나무로 만든 것이라 한다. 매화말발도리, 쥐오줌풀, 홀아비 꽃대, 당개지치, 미나리냉이꽃, 노란제비꽃, 흰제비꽃, 졸방제비꽃… 등등. 꽃 이야기에 취해 걷다 보니 어느새 바람재다. 살랑이던 바람도 이곳에만 오면 기세를 더한다. 바람재 머리 위로는 형제봉과 황악산이 버티고 있다. 일모도원(日暮道遠), 갈 길이 먼데 날은 저물고 있다. 꽃을 탐하던 벌'나비도 이제 보금자리로 찾아들고 있다.

글'박용우기자 ywpark@msnet.co.kr 사진'서하복작가 texcaf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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