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사랑 산사람] 춘천 삼악산

입력 2012-05-10 14:00:36

에메랄드빛 호수 한복판 붕어섬 금방이라도 물위로 튀어오를 듯

벚꽃의 꽃말은 중간고사? 꽃과 시험의 불편한 조합, 우연 치고 세상의 섭리는 너무 잔인하다. 아이들에게 봄꽃은 버스 차창 너머로 스치는 관상일 뿐. 왜곡된 교육정책을 바로잡는 길, 수백 수천의 방법이 있겠지만 아이들에게 꽃을 찾아주는 일도 작은 해법일 수 있다.

아이들 뒤치다꺼리하느라 어른들도 꽃그늘 밑에 한 번 서보지 못했다. (빌어먹을 정책은 어른들에게까지 연대책임을 지운다.) 봄꽃 시효를 놓쳐버렸다고 아쉬워할 필요는 없다. 봄의 '시즌2' 신록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싱그럽기로야 신록이 꽃만 못하랴. 이 연초록의 배경에 호수가 있다면 '금상첨호'(錦上添湖)가 아니겠는가. 신록과 호수와 철늦은 봄꽃들이 경연을 벌이는 춘천 삼악산으로 떠나보자.

◆삼악산 자락엔 맥국'후삼국 궁예 흔적 서려

경주 하면 신라, 부여 하면 백제를 떠올리듯 춘천 하면 맥국(貊國)이 연상된다. 맥국은 삼국시대 이전 춘천에 할거하던 소국이었다.

삼악산에는 맥국과 관련된 지명과 전설이 많다. 산의 중심부에 위치한 삼악산성은 신라와 예(濊)의 공격을 받은 맥국이 최후로 저항했던 곳이다. 등선폭포 일대는 군사들이 쌀을 씻었던 곳이라 하여 '시궁치'라 불렸고 아랫마을은 군사들이 옷을 말리던 곳이라고 의암(衣巖)이라 이름했다. 우두(牛頭)산성, 월곡리 능산(陵山), 신북의 대궐 터도 옛 맥국의 흔적들이다.

시대를 하한하여 후삼국시대에 삼악산은 또 한 번 전화(戰禍)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태봉을 일으킨 궁예는 그의 최대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왕건과 철원에서 패권을 놓고 일전을 벌였다. 중과부적이었던 궁예는 왕건에게 패했고 패잔병을 이끌고 삼악산성으로 피신했다. 궁예는 성안에 흥국사라는 절을 짓고 절 이름처럼 국가부흥을 도모했으나 심복들에게 배신당하고 도피 중에 백성들에게 맞아죽었다. 고대에서 중세에 이르기까지 열국들이 이렇게 춘천을 탐낸 이유는 이곳이 수로, 국방, 수운의 요지인데다 반도의 젖줄 한강이 시원(始原)하기 때문이다.

봄(春)이 오는 내(川). 예쁜 이름만큼이나 춘천은 물의 도시다. 1천116㎢ 면적에 소양호, 의암호, 춘천호 등 세 개의 큰 호수를 들이고 있다. 호수의 물은 춘천호반에서 모두 모인 후 의암댐을 거쳐 북한강으로 흘러든다.

산은 호수의 자연제방인지라 산과 호수의 결합은 필연적이다. 이런 이유로 춘천지역 산행의 최고 매력은 호수 조망이다. 물 위를 미끄러지듯 진행하는 산행의 묘미는 이곳에서만 누릴 수 있는 이벤트다.

그중에서도 오봉산, 사명산, 삼악산이 호수 조망의 대표 산으로 꼽힌다. 오봉산은 소양호 본류가 가려 조망이 협소하고 사명산은 시야가 소양댐 상류로 한정된다.

호수 조망의 베스트는 뭐니 뭐니 해도 삼악산이다. 바로 발밑에서 물을 차고 오르기 때문에 호수와 스킨십은 기본이고 고도를 높여갈수록 달라지는 호반의 변화를 눈앞에서 감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상원사-용화봉-등선폭포 코스 무난

강촌에서 북한강변을 따라 상원사매표소로 가는 길. 제일 먼저 의암호가 일행을 반긴다. 에메랄드빛 물결의 파장에서 춘천의 정취가 느껴진다.

등산코스는 크게 두 가지. 의암댐에서 상원사로 올라 정상을 찍고 등선폭포로 내려오거나 강촌역에서 올라 등선봉-정상-의암댐으로 진행하는 코스다. 강촌역 길은 코스가 단순하고 등락이 심해 잘 이용하지 않는다.

등산로는 가파르다. 눈짐작으로도 평균 40, 50도는 돼 보이고 암릉구간에서는 70도를 오르내리기도 한다. 매표소를 지나 20여 분, 첫 목적지 상원사에 이른다. 상원사에서 식수를 채우고 급경사를 또 오른다. 돌계단에 암릉뿐인 경사는 무릎을 계속 압박한다. 이 작은 산에 왜 악(岳)자가 붙었는지 바로 이해가 된다.

30여 분 고투 끝에 정상 바로 밑 철계단에 이른다. 어느덧 고지는 600m대. 이제 산은 밑자락에 호수를 펼쳐 보인다. 박무(薄霧) 사이로 코발트색 물결이 희미하게 일렁인다. 호숫가엔 막 꽃잎을 떨군 나무들이 연초록으로 물결치며 물빛과 배색(配色)을 맞춰준다.

인공호수인 의암호는 수심이 무척 얕다. 갈수기에는 상류 하상(河床)이 금방 드러날 정도. 10m 안팎 수심에서 저렇게 아름다운 물빛이 나온다니 신기하기만 하다. 10여 분 후 잡목 사이로 정상석이 일행을 맞는다. 이곳 정상은 용화봉(645m)이고 능선을 따라 청운봉, 등선봉이 배치돼 있다. 삼악산은 바로 이 세 봉우리를 이르는 말이다.

한껏 높아진 고도. 이제 조망은 절정으로 치닫는다. 북동쪽 멀리 춘천시내가 한눈에 펼쳐지고 앞쪽엔 중도유원지가 옅은 녹음을 머금고 있다. 호수 한복판엔 의암호 명물 붕어섬이 자리 잡고 있다. 머리를 북쪽으로 둔 붕어는 금방이라도 지느러미를 움직여 물살을 가를 것만 같다.

◆호수 한복판 붕어섬, 지금은 집광판 가득

한때 낚시꾼들의 로망이었던 붕어섬. 지금은 태양열 집광판이 섬을 가득 메웠다. 자연과 낭만이 인공과 실용으로 대치된 느낌에 기분이 내키지 않지만 붕어가 비로소 비늘을 입은 것이라고 스스로 위안을 삼는다.

옛날 삼각산은 서울로 통하던 유용한 교통로였다. 서면의 덕두원은 옛날 경향(京鄕)을 오가던 상인, 관리들이 묵던 원(院)이 있던 자리고 삼악산성 쪽 서쪽 석파령은 옛날 서울로 통하던 유일한 관문이었다.

이런 국방, 교통의 요충에 자리한 탓에 고대부터 이곳은 주변국들의 격전장이었다. 정상 부근의 널찍한 평지에는 지금도 깨진 기왓장, 벽돌들이 수도 없이 굴러다닌다. 한때 대궐의 부품, 성벽의 속품이었던 것들이 용도를 잃고 나뒹구는 현실에서 세월의 무상함을 실감한다.

호수 물결에 작별의 시선을 던지고 일행은 등선폭포 쪽으로 하산 길을 잡는다. 333계단에서 또 한 번 경사 길을 이어놓던 산길은 흥국사에 이르러 널찍한 안부를 펼쳐 놓는다. 이곳에서 궁예는 왕건과 싸우며 후고구려 부흥을 위한 마지막 일전을 벌였다.

산길은 뚝 떨어져 다시 종아리를 압박한다. 30여 분쯤 진행하자 청명한 물소리가 계곡을 울린다. 등선(登仙)폭포다. 폭포 양쪽은 수십 길 절벽으로 된 U자형 협곡. 이 계곡을 따라 선녀탕, 비선폭포, 등선폭포 등 크고 작은 폭포들이 늘어서 있다. 이름처럼 선녀, 신선들의 놀이터였으니 과연 선계(仙界)의 풍경이라 할 만하다.

이런 비경 속에 전쟁의 상흔이 배어 있다니 무척 유감스럽다. 수렴 같은 폭포줄기에는 맥국 병사의 절규소리가 배어 있고 비취빛 선녀탕은 태봉국 군졸들의 피가 흘러들었던 곳이다.

당시의 비극을 아는 듯 모르는 듯 폭포는 무심히 공명한다. 세상사 그렇듯 자연과 인간사는 궤도도 다르고 순환주기도 다르다. 봄꽃과 아이들 시험이 어깃장 지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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