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남희의 즐거운 책 읽기] 열애/ 김별아/ 문학의문학

입력 2012-05-10 14:10:52

TV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미실'은 단연 돋보였다. 주인공인 선덕여왕보다 더 돋보인 미실이라는 인물을 저 아득한 신라시대로부터 우리 앞으로 데려온 이는 누구일까? 그는 '내 마음의 포르노그라피'라는 장편소설 이후 '논개' '채홍' '백범' 등 역사 속 인물을 생생하게 되살려낸 소설들을 잇달아 써내고 있는 소설가 김별아다. 그가 이번에는 식민지 조선의 아들과 식민제국 일본의 딸로 태어나 불꽃 같은 사랑을 불태우다 사라져간 박열과 후미코를 우리 앞에 데려왔다. 소설 '열애'는 그 둘의 뜨거운 삶과 사랑 이야기이다.

박열은 식민지 땅에서 태어나 스스로 각성에 이른 청년이었다. 그는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에 교사가 되기 위해 사범학교에 다니고 있었으나, 식민지 청년의 울분을 느끼면서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참여하게 된다. 3'1 만세운동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었다. 경성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거리마다 장터마다 만세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지만 함께 시위에 참가했던 학생들이 하나 둘 일본경찰에 체포되면서, 주동자를 색출하려는 경찰의 포위망도 점점 좁혀졌다. 일제의 탄압을 피해 미래를 기약하며 상하이로, 만주로, 연해주로 많은 독립지사와 청년학생과 농민들이 떠나고 있었다. 박열은 일본으로 가기로 했다. 호랑이를 잡기 위해 호랑이굴로 들어가고자 했다. 그런 결심의 한편에는 비록 학교는 자퇴했지만 못다 한 공부를 마치고 싶다는 열망도 숨어 있었다.

3'1운동 이후 많은 지식인과 청년 학생들이 새로운 사상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박열은 무권력, 무지배, 모든 개인의 자주자치에 의해 운영되는 평화 세계를 동경하였다. 그리하여 절대로 권력이 행사되지 않을 것을 표방하는 무정부주의를 마음에 품게 되었다.

한편 김한이 발족한 무산자동맹회의는 중국에서 활동하는 의열단과 관련이 있었다. 의열단은 조선을 해방시키고 계급을 타파하여 토지를 균분한다는 강령하에 수많은 암살과 파괴 사건을 실행하고 있었다. 밀양경찰서 폭탄투척사건, 조선총독부 폭탄투척사건 외에도 상하이에서 다나카 기이치 육군대장 저격 폭탄투척 미수사건을 일으켜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바 있었다. 당시 폭탄 투척은 거대한 일제에 저항하기 위해 조선인이 취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항거수단이었다. 박열은 의열단으로 일본에서 암중모색하며 활동을 벌이게 된다.

박열과 후미코의 만남은 우연이었다. 후미코는 학대당한 유년의 상처 때문에 고통과 절망 속에 몸부림치던 여성이었다. 그는 박열에게서 자신이 찾던 무엇인가를 발견하고 함께하고 싶다는 열망을 표현하였다. 박열이 미워한 것은 일본의 지배자와 권력자였지 일본인 개인이 아니었기에 그들의 사랑에는 아무 문제될 것이 없었다.

1923년 도쿄와 요코하마를 중심으로 한 간토지방 대지진이 일어나자 일본인들의 공포와 분노는 엉뚱하게도 조선인들에게 로 향했다. 희생 제물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 결과, 일본 각지에서 6천600여 명에 달하는 조선인들이 참혹하게 살해당했다. 이 과정에서 박열과 후미코는 뜻밖에도 천황 암살 모의 혐의로 체포되었다. 대지진으로 혼란스러워진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일본 당국이 의도적으로 쳐놓은 그물에 걸린 것이다. 억울한 혐의를 쓰고 재판정에서 사형선고를 받던 순간에도 의연하였던 박열과 후미코는 여론을 두려워한 일본 당국에 의해 무기징역으로 감형된다.

그후 후미코는 감옥에서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하였고, 감옥 안에서도 의연하게 버티며 일제에 항거하기를 멈추지 않았던 박열은 1945년 해방이 되고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22년 2개월 만이었다. 스물다섯 살 청년이던 그는 마흔일곱의 중년이 되어 있었다.

어려운 여건 때문에 뜻을 마음껏 펼치지 못하고 긴 옥살이를 해야 했지만, 일제에 굴복하지 않고 민족의 기개를 높이 떨친 박열과 후미코의 뜨거운 사랑은 학대받는 자들 간의 연대와 피 끓는 청춘의 빛나는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수성구립 용학도서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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