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발디딘 이상 멈출 수 없어 …시대적 경험 살려 남북문제 앞장
"지난 인생에 우연은 없었던 것 같다. 해인사에서 2년여 머무르고, 경북 고령으로 주소지를 옮기고, 또 국회의원이 돼 매일신문과 인터뷰를 하게 된 것이…. 인생이 정교한 시나리오처럼 진행됐다. 모든 것이 인과관계가 있는 것 같다. 종교적으로 해석하면 하느님의 뜻일 수도 있고, 업보나 인연일 수도 있겠다."
1989년 여름 북한 평양에서 열린 '세계청년학생축전'(평양축전)에 참가해 남북은 물론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임수경. 이른바 '운동권'으로서 치열한 삶을 살아왔던 그가 '이념'이 묻어나는 용어 대신 '인연'을 자연스럽게 입에 올렸다.
임수경(44)은 방북 이후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통일운동가로 또 사회운동가로 활동했지만 어느 순간 몸조차 가누기 힘든 고통이 찾아왔다. 아들을 잃고, 가족과 헤어지는 아픔에 결국 그의 선택은 반은둔생활이었다. 인생의 여명이 짙음은 누구도 알 수 없다 했던가? 한동안 사회에서 잊혔던 그가 불쑥 국회의원 당선자(민주통합당 비례대표)가 됐다. 최근 계산성당에서 기자와 만난 임 당선자는 '투사' 이미지보다는 푸근하고도 여유로운 40대 아줌마의 넉넉함이 묻어났다.
◆'통일의 꽃'에서 정치인으로
"임기가 시작되지 않아 아직 실감이 안 나요. '국회의원 임수경'이 다소는 어색하네요."
임 당선자는 국회의원이 되기 위한 어떤 구체적인 계획도, 움직임도 없었다고 했다. 나름 삶에 충실하다 보니 물 흐르듯 국회의원에 당선됐고, 현재의 모습으로 와 있었다는 것.
"사실 잠이 안 오고, 어깨가 무겁고, 발걸음이 무겁습니다. 국회의원이 된 것은 내가 가진 능력에 비해 큰 짐을 진 것 같아요. 하지만 이미 발걸음을 내디딘 이상 멈출 수는 없겠죠."
그는 2명의 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을 했을 정도면 역사의 한쪽으로 물러나도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의 남북분단 구도를 정치적으로 악용되는 모습을 자주 보면서 이에 대해 적극적으로 문제 제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섰다고 했다.
그는 국회에 들어가면 남북문제에 천착할 계획이다. MB정부 들어 남북관계가 경색됐는데 여야 가릴 것 없이 그의 시대적 경험을 전수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남북 정상이 공동선언에서 백두산 직항로 개설, 황해도 해주 하구 공동이용 등에 합의했지만 실행되지 못하고 있는 데 대해 그의 아쉬움은 크다.
"이것들은 망상이 아닙니다. 실천할 수 있는 내용이에요. 앞으로 남북이 장기적이고 일관성 있는 협약을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보수도, 진보도 뛰어넘고파"
자신이 '주사파'인지, 아니면 '종북세력' 인지를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는 종북이라는 단어는 잘못됐다고 했다. 북한에 대해 알고, 가깝게 교류하며 이해의 폭을 넓히는 일은 각자의 이념을 떠나 시대적 소명이라고 했다. 그런데 MB정부 들어 북한과 너무 대결구도만 만들고, 그러다 보니 종북이라는 비정상적인 단어가 나오게 된 것이라는 것이다.
"이른바 이전의 주사파들은 지금 거의 다 뉴라이트로 돌아섰어요. 극과 극은 통하는 법입니다. 어떤 세력이나 이념이 실재하기보다는 상대를 공격하기 위해 무슨 '파'니 해서 프레임을 설정하는 것으로 봅니다. 나는 단지 민족문제, 통일문제에 깊이 관여하며 열심히 노력할 것입니다. 나는 '평화파'예요."(웃음)
그는 우리의 민주주의, 남북관계, 인권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점진적인 발전을 해왔다고 보고 있다. 역사는 발전하고 변화하는 것이라 믿고 있고 대구경북도 늦지만 서서히 변화할 것으로 믿는다고 했다.
"나에 대한 평가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위험한 사람이 아니다'는 것을 지난 20년간 끊임없이 보여주고, 증명했다고 봐요. 우리 사회는 이 같은 편견, 허상과의 싸움이 필요합니다."
◆고령은 '제2의 고향'
임 당선자는 방북 이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5년을 선고받아 3년 5개월간 감옥생활을 했다.
1995년 결혼을 했지만 4년 9개월 만에 이혼하고 홀로 아들을 키웠다. 하지만 2005년 영어연수차 간 필리핀 세부에서 당시 9살이던 아들이 익사하는 아픔을 겪었다. 임수경은 아들이 쓰던 휴대폰을 아직 지니고 있다.
"해인사에 아들의 49재를 지내러 갔다가 못 나왔어요. 해인사는 아이를 데리고 자주 다녔던 곳이에요. 2005년 여름부터 2006년까지 해인사에 머물렀고 당시 '해인'지 기자로 활동했어요."
그는 해인사에 머물며 취재도 하고, 기도도 열심히 했다. 1년 반 정도 해인사에 있다가 경북 고령읍 지산리로 이사를 갔다. 주소지도 옮겼다. 주말마다, 방학 때마다 고령에서 지냈다.
"고령에 이사한 것은 산천초목이 아름답고, 대가야 문화도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에요. 고령에서 친구도 많이 사귀었어요. 고령은 '제2의 고향'입니다." 그는 고령에서 지내며 사회로 복귀할 용기를 얻었다고 했다.
"지난 20년 세월은 참 어려웠습니다. 견디고 부딪치고 이겨냈던 과정이었어요."
임수경은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며 이야기한 게 얼마 되지 않았다고 했다. 절 생활이 좋았던 건 아무도 물어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른 아이들을 안을 수 있게 된 것도 최근 일이다.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려고 하지도 않고, 나의 삶을 재단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앞으로 '인연'을 되새기며 고령과 대구경북을 위해서도 역할을 찾고 싶어요."
황희진기자 hhj@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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