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 끝으로 '사랑' 톡톡 부부의 아름다운 소통
짜릿한 느낌이 좋다. 인터뷰를 할 때도 이런 느낌이 오면 의욕이 충만된다. 누굴 만났는데 짜릿했다면 글을 쓰고 싶은 욕구가 배가 된다.
이번 주는 오래전부터 한 번 만나서 얘기를 나누고 싶었던 부부가 주인공이다. 바로 암스테르담 국제다큐멘터리 영화제 장편 경쟁부문에서 대상을 받고 현재 한창 상영 중인 다큐멘터리 영화 '달팽이의 별'의 실제 인물이다. 남편 조영찬(1971년생), 아내 김순호(1963년생) 씨다. '조아'라는 영화사를 통해 인터뷰 섭외를 할 수 있었다. 이달 26일 대구에서 어렵게 찾아간 곳은 충남 천안시 나사렛대 캠퍼스. 두 사람은 인터뷰 장소에 아름답게 등장했고, 2시간 30분가량 질문과 대답을 주고 받고 사진까지 찍은 후 "그 어느 때보다 즐거운 인터뷰를 했다"며 멀리서 온 기자의 기분까지 배려해줬다.
먼저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시청각 중복장애) 영찬 씨의 자작시를 독자들에게 들려주고 싶다. 먹먹하면서 울림을 주는 글이다.
/가장 값진 것을 보기 위하여 잠시 눈을 감고 있는 것이다/가장 참된 것을 듣기 위하여 잠시 귀를 닫고 있는 거다/가장 진실한 말을 하기 위하여 잠시 침묵 속에서 기다리고 있는 거다/
영원한 문학소년을 꿈꾸는 영찬 씨는 그렇게 시를 쓰고, 소설도 쓰려 한다. 또 다른 자작시도 가슴을 파고 든다.
/태초에 어둠과 적막이 있었다. 어둠과 적막은 신과 함께 있었고, '나'가 나타나자 '나'에게로 왔다/
◆순호 씨, '우린 이렇게 만났어요'="1997년 7월 8일. 대전의 한 장애인선교회에서 연극관람을 하고, 저와 영찬 씨 그리고 후배 흥신이와 함께 차에서 내렸어요. 저녁 무렵이라 식사했냐고 물었고, 둘 다 안 했다기에 제 자취방에서 두 사람에게 라면을 끓여줬고, 땀을 흘리는 두 사람에게 목물을 해줬습니다. 그게 영찬 씨에게 감동이 됐나 봐요. 이후 영찬 씨는 하나님의 뜻을 통해 제게 청혼을 했고, 1998년 5월 결혼했습니다. 올해 결혼 15년차입니다. 사랑은 더 영글고 깊어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아름답게 살려고 노력했는데, 이렇게 영화의 주인공이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랬다. 순호 씨는 영찬 씨의 삶에 기꺼이 동승했다. 순호 씨는 어릴 적 사고로 인한 척추장애로 키가 120㎝밖에 되지 않지만 다정다감한 마음씨와 호감형 얼굴 때문에 남자들에게 데이트 신청을 많이 받았다. 하지만 그녀는 영찬 씨의 가슴 속 깊은 고독과 진솔함에 마음이 열렸다. 그래서 15년째 영찬 씨와 함께 울고 웃고 꿈꾸고 있다. 깊은 사랑은 아름답게 영글어 세상 사람들에게 감동적인 스토리를 들려주고 있다. 그래서 눈도 귀도 제 기능을 못해 오로지 촉각으로 세상을 느끼는 영찬 씨를 '달팽이'에 빗대고 이 지구를 '별'로 표현해, '달팽이의 별'이라는 감동적인 다큐멘터리 영화가 등장한 것이다.
물론 이들의 사랑을 세상 밖으로 끄집어 낸 이승준 감독의 몫도 컸다. 이 감독은 오랜 인내심과 설득으로 부부로부터 영화촬영 승낙을 얻어냈고, 영상을 통해 잔잔한 감동으로 승화시켰다. 영화는 각종 국제영화제 수상이라는 값진 성과를 얻어냈다.
◆유모 감각이 뛰어난 영찬 씨, =인터뷰 중 영찬 씨의 감동 어린 엉뚱한 화법 때문에 몇 번 놀랐다. 이 코드는 '달팽이의 별'이라는 영화에도 그대로 녹아있다. 그래서 이 영화가 가볍게 터치하면서 큰 감동을 선사했던 이유였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15년 전 순호 씨가 끊여준 라면을 먹을 때 어땠냐고 묻자, 그는 "사랑의 라면이었는데, 라면은 배 속으로 들어가고, 사랑은 가슴 속으로 파고들었다"며 멋지게 표현했다. 그리고 "저는 뭔가 가슴에 꽂히는 일이 있으면 쉽게 뿅가는 남자인데, 순호 씨에게 완전 뿅갔다"며 순호 씨마저 얼굴을 붉게 만들었다.
요즘은 540만원짜리 점자 단말기와 노트북을 연결해 트위터(twitter)를 하는데 다른 사람과 소통하는 재미에 "또 뿅갔습니다"고 말해 다시 한 번 웃음보를 자극했다. 사랑 표현은 자주 하느냐고 묻자, "수시로 하는데 너무 자주 하면 헤퍼지는 것 같아 조금 자제하려 합니다"고 말했다.
아내에게 호칭은 어떻게 하느냐는 질문에는, "결혼 전에는 누나라고 불렀는데, 요즘은 '어딨어', '여보시오'라고 부른다"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영찬 씨의 3대 기적
27년 동안 절대 고독과 맞서며 살아온 영찬 씨. 보지도 듣지도 않으니 누구와 소통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나마 청각은 어릴 때 살아있었으나 18세가 지나면서 주변 세상의 소리도 외계어처럼 들리기 시작했고, 결국 시'청각 중복장애인이 됐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의 인생은 기적 그 자체'라고 한다. 첫째 기적은 순호 씨와 결혼한 일을 꼽았다. 결혼 자체를 못할 줄 알았는데 이렇게 천사(?)를 내려다 준 것은 하나님이 베풀어 준 기적 중 하나. 둘째 기적은 점자 단말기 당첨. 당시 고가(540만원)의 점자 단말기를 받으려면 100대 1의 경쟁률을 뚫어야 했다. 그리고 인터넷을 통해 세상과 소통했다. 셋째 기적은 배움에 대한 욕구다. 영찬 씨는 점자 단말기와 순호 씨, 그리고 도우미들 때문에 나사렛대 신학과를 졸업했고, 대학원에도 진학했다. 그는 이제 자신의 장애를 넘어 순호 씨와 함께 시'청각장애인을 위한 복지센터 건립 등 장애인들을 위한 복지사업에 좋은 아이디어를 내고, 실천하는 일을 준비하고 있다.
◆오! 놀라워라, 두 사람의 소통
인터뷰 시작부터 놀랐다. 가방에서 뭔가 많이 꺼냈다. 기자도 처음 본 점자 단말기와 노트북, 휘어지는 키보드판, 그리고 각종 케이블. 잠시 뒤 점자 단말기의 전원을 켜니 소통이 시작됐다. 대화 중 답답함을 거의 느끼지 못했다. 기자가 질문을 하면 순호 씨가 동시에 자판으로 두드리고, 이에 영찬 씨는 점자 단말기를 통해 기자가 한 말을 정확하게 알아듣고, 자신의 의사를 표현했다.
또 한 번 놀란 사실은 가끔 순호 씨가 영찬 씨의 열 손가락에 대고 컴퓨터 자판을 치듯 두드리니 영찬 씨가 무슨 말인지 알아듣고, 자신의 열 손가락으로 순호 씨의 열 손가락에 대답을 해줬다. 놀라운 소통 능력이었다. '도대체 저게 가능할까?' 의구심이 계속 들었다. 순호 씨에 따르면 이는 '손으로 하는 점화'라고 한다.
또 다른 소통 방법이 있었다. 주변이 아주 고요한 상태에서 순호 씨가 영찬 씨의 귀에다 대고 큰 소리로 얘기하면 영찬 씨는 들을 수 있다고 한다. 영찬 씨는 "기자님의 목소리도 좋을 것 같은데 오늘 장소(교내 카페)가 너무 시끄러워 들을 수가 없네요. 아쉽습니다"고 했다.
◆2세를 꿈꾸고 있는 달팽이 부부
순호 씨="제가 덩치가 너무 작아서 혹시 아기가 생기더라도 힘들 것 같아요. 시험관 아기도 힘들 것 같고, 그래서 지금은 입양도 생각하고 있어요. 이젠 둘 사이에 2세가 생기더라도 아름답게 잘 키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시어머니가 너무 좋아해요. 우리 아들 세상과 소통하게 해 준 며느리라고요. 호호호!"
영찬 씨="네! 제가 아이들을 너무 좋아해요. 저를 보고 사람들이 탤런트 차인표 닮았다 아니면 축구선수 안정환 닮았다고 하는데 실제 그런가 봐요. 전 제 얼굴을 평생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니까요. 그래도 조영찬 주니어가 있으면 좋죠. 잘 키울 수 있을 것 같아요. 제 인생의 4번째 기적도 일어나겠죠?"
영찬 씨는 마지막으로 존경하는 사람에 대한 언급을 했다. 죽은 사람 중에는 헬렌 켈러, 살아있는 사람 중에는 일본 도쿄대 후쿠시마 사토시 교수란다. 사토시 교수는 2006년 8월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시청각장애인대회에 참석해 만났는데, 시청각 복합장애인임에도 세상과 당당하게 소통하라고 했단다. 사토시 교수의 저서 '손가락 끝으로 꿈꾸는 우주인'을 읽고, 큰 감명을 받았고, 세상에 나설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고 전했다.
권성훈기자 cdrom@msnet.co.kr
사진'성일권기자 sungi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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