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흔적] 성서 조약국 '혜산관'

입력 2012-04-19 14:09:55

구슬·성냥통…어떻게 저런 것까지 모아뒀을까

통행금지 시절의 야간통행증, 대통령이 보내온 선물, 훈장, 수십 년 사용한 진료 책상, 구슬, 양철도시락, 풍년초와 환희 등 오래된 담배들, 어린이들의 추억이 담긴 풍선…. 성서 조약국 흥생한의원 뒤편에 보물창고가 있다. 그곳엔 조경제(91) 원장과 90년을 함께해 온 삶의 발자취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곳에 들어서면 마치 오래된 앨범을 보고 있는 기분이다.

◆추억의 물건 차곡차곡

대구경북에서 '성서 조약국'을 모르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하지만, 한의사로서의 조 원장과 진료공간으로서의 성서 조약국만 알 뿐 정작 그가 일생 동안 모은 삶의 발자취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조 원장의 인생살이는 특별하다. 90세가 넘었지만, 요즘도 하루 종일 환자를 만나 진료를 한다. 그는 "사람의 목숨을 다루는 한의사가 어떻게 게으름을 부릴 수 있는가?"라며 요즘 젊은 의료진들의 '칼퇴근'(?) 추세에 대해 엄하게 꾸지람을 한다.

한의원 뒷동네(?)에는 조 원장이 살아온 옛집과 그의 흔적이 담긴 '혜산관'이 있다. 혜산관에 들어서면 마치 정지용의 시 '향수'를 읽는 듯한 기분이 든다. 성서의 옛 모습과 평생 성서를 떠나본 적이 없는 조 원장의 일거수일투족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개인의 흔적이지만 지역 사회의 역사이기도 하다.

"어떻게 이런 것까지 모아둘 수 있을까?" 놀라움의 연속이다. 아련한 기억만 남아 있는 풍선과 구슬, 라면, 성냥통, 담배 등 옛날 물건들을 보면서 '아~하, 그땐 그랬지'하는 생각과 함께 반가움이 솟아난다. 조 원장은 아무리 사소한 물건이라도 그것에 의미를 부여한다. 그래서 무엇이든지 버리지 않고 보관하는 성격이다.

◆개인의 인생도 역사

혜산관 2층 입구 진열장에는 조 원장이 각종 행사참석 때 가슴에 꽂았던 내빈용 코사지가 가지런히 전시돼 있다. 맏아들 강래(55·푸른방송 대표) 씨는 "아버지의 성격을 표현하는 상징"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아버지께서 각종 행사장에서 꽂은 코사지를 한 점도 버리지 않으시고 가져와 종이통에 차곡차곡 모아 둔 것"이라고 밝힌다. 조 원장은 "남들은 별것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을지 몰라도 이 물건을 준 그 사람의 심경을 생각하면 함부로 버릴 수는 없는 것 아니냐?"고 반문한다. 남을 배려하는 그의 따스한 사랑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조 원장이 혜산관에 대해 설명한다. "예전 같으면 얼마든지 쓸 수 있는 귀중한 물건들이 무진장 버려지고 있으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풍요로운 삶이 과연 아름답다 할 수 있을까? 그래서 내가 쓰던 소중한 물건들을 버릴 수는 없다"고 강조한다.

그가 가장 아끼는 물건은 1945년 해방을 기념해서 산 '벼루'다. 그리고 한의사가 되기로 한 후 동양의학전문학원에 다닐 때 타던 자전거도 애지중지한다. 자전거에는 '감찰 315 경북 달성'이란 번호판이 선명하다. 1층 입구에 있는 벼락 맞은 대추나무로 만든 소 여물통도 조 원장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물건이다. 이뿐 아니다. 자신의 삶을 기록한 조 원장의 일기장 수십 권이 별도로 보관돼 있다. 또박또박 쓴 일기장은 조 원장의 삶의 궤적이다. 맏아들 강래 씨는 "앞으로 이곳을 조상이 살아온 흔적을 남기는 박물관으로 만들 계획"이라고 밝힌다.

사진·이채근기자 mincho@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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