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선반공예 인생 반세기…'명장' 꿈꾸는 손세창씨

입력 2012-04-18 09:30:08

"중국산에 밀린 목공예…웰빙제품으로 위기 탈출"

대구시 동구 팔공산 자락에서 작업실을 차려두고 열심히 나무를 깎고 있는 나무선반공예가 손세창 씨. 성일권기자 sungig@msnet.co.kr
대구시 동구 팔공산 자락에서 작업실을 차려두고 열심히 나무를 깎고 있는 나무선반공예가 손세창 씨. 성일권기자 sungig@msnet.co.kr

"5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나무만을 깎아온 '장이'로서 꿈이 있다면 자칫 중국산에 밀려날 위기에 있는 우리나라 나무선반공예의 맥을 올바르게 잇게 하는 것입니다."

대구시 동구 도동 측백수림 인근 팔공산 자락 공방에서 나무를 깎으며 묵묵히 우리나라 목공예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는 목공예가 손세창(61) 씨.

"15살 때 목공소에 심부름꾼으로 취직했고 선반을 이용해 나무를 깎아내는 일이 신기해서 배운 것을 지금까지 계속하는 셈입니다. 제 삶의 궤적을 보면 1970년대부터 2000년대 초까지 우리나라 목공예 산업의 부침을 그대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어요."

1990년대 말과 2000년대 초 손 씨는 대구경북공예조합이사장과 목공예분야 대한민국 신지식인에 선정된 적 있다. 조합 이사장 시절 대구 목공예품의 우수성을 알리기 위해 미국, 일본, 중국 등 해외시장 개척 최선봉에 섰고 대구 두류공원에 목공예특산품 전시장도 열었다. 조합원들이 만든 생활용품으로 바자회를 열어 소년소녀가장돕기, 장애우시설돕기 등도 펼쳤다.

특히 플라스틱 생활제품이 범람하기 시작한 1970년대 후반과 80년대 초 나무를 이용한 회전형 옷걸이와 국산나무 야구배트를 개발해 공전의 히트상품을 기록하기도 했다. 그때까지 나무도장이라면 '막도장'뿐이던 시절에 인'도장 몸통을 처음으로 화려하게 디자인한 사람이기도 하다.

하지만 세상의 풍파는 목공예 장인의 역할만 허락하지는 않았다. 현재의 도동 공방에 칩거하며 반쯤 속세를 벗어나 살기까지 세 차례 사업실패를 경험했다. 값싼 중국산에 밀려난 것. 국내에서 히트한 제품은 곧바로 중국에서 베껴 다시 국내로 수입됐기 때문이다. '그래도 배운 것이 도둑질'이라고. 툴툴 털고 4년 전 정착한 곳이 지금의 팔공산 자락이다.

"파란만장한 삶이었죠. 손재주를 썩히지 않게 하려고 지금도 하루에 몇 점씩 목공예 작품을 만들고 있습니다. 지인들이 가끔 찾아오면 실비만 받고 주고 있습니다."

죽은 나뭇가지의 자연형태를 그대로 살린 작은 국자부터 차 사발, 밥과 국 사발은 물론 대추나무 도장목까지 다양한 작품을 만든다. 특히 도장목을 통째로 깎아 고리가 움직이게 만든 작품은 손 씨의 섬세한 솜씨를 짐작하기에 충분하다.

손 씨는 요즘 걱정이 많다. 우리 목공예의 맥이 중국산에 밀려 사라질까 봐서다. 숙련되려면 5년의 노력이 필요한 점도 선뜻 목공예를 배우지 않으려는 데 한몫을 한다.

사실 그는 두 차례 명장신청에서 고배를 마셨다. 올해 세 번째 명장신청을 하려고 한다. 그래야만 후계자 양성과 전통이 이어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만약 명장이 되면 제 꿈이 좀 더 빨리 실현될 수 있을 겁니다. 팔공산 자락에 공예마을을 조성하고 싶어요. 가볍고 견고한 나무공예제품은 요새 말로 웰빙제품이라고 할 수 있죠. 제대로 된 공방에서 제대로 된 제품을 생산한다면 충분한 부가가치는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음속에 다시 한 번 대구지역의 목공예산업이 꽃피기를 기원한 목공예장인 손세창 씨. 그는 이 기원이 있어 선반에서 깎인 나뭇 밥이 날리는 공방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우문기기자 pody2@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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