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암칼럼] 이름, 이름, 이름들…

입력 2012-03-26 11:08:09

온 길거리에 '이름'들이 나부낀다. 네거리 큰 빌딩의 선거 사무실 벽면 걸개 현수막에도, 가로수나 전봇대에 걸쳐진 플래카드에도 이런저런 당명(黨名)과 후보 이름들이 봄바람에 펄럭인다. ○○○, △△△…. 이름 앞뒤에는 '△△△다운 인물' '○○○한 정당'이란 수식어들이 붙어 있다. 선거전이 불붙기 시작하면 더 많은 이름과 구호들이 길거리를 치장할 것이다.

이름이 만들어진 데에 대한 설(說)들은 여러 갈래다. 이름 명(名) 자(字)는 저녁 석(夕)자 아래에 입구(口)자가 붙어 있다. 어두운 밤에 사람이 잘 보이지 않아 입으로 상대를 부른다는 뜻에서 생겨난 글자라는 주장까지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그 사람의 행동이나 인품, 생김새의 특징을 보고 이름을 지어줬다고도 한다. 칼리니구스(승리자), 에우에르게스(어진 사람) 같은 이름이나 푸스코(뚱뚱보), 그리푸스(낚시코), 술라(여드름이 많은 사람) 같은 이름이다. 이후 로마시대로 들어오면서 이름은 사회적 신분과 권위를 상징하는 쪽으로 바뀌어갔다. 율리우스 시저도 미의 여신인 비너스를 조상신으로 섬기는 율리우스 가문의 이름과 가이우스란 개인 이름 그리고 최고 통치자라는 의미의 카이사르를 붙여 귀족 가문의 권위를 과시하려 했었다.

우리 역시 고려시대 성(姓)이 없는 자는 과거에 급제할 자격을 주지 않는다는 법령이 나와 성(姓)을 가져야 행세하는 집안으로 인정되는 풍조가 나타난 것이나 조선조에 아명(兒名)이 '개똥이'였던 고종황제처럼 천한 이름을 덧붙여 무병장수를 기원한 경우도 있었다.

이처럼 이름은 그 사람의 신분, 특징, 권위나 염원들이 함축된 여러 의미가 따라붙게 된다. 특히 정치적 인물 중에는 주로 그 사람의 치적이나 정치적 역량 등을 따서 별명이나 호칭을 붙인 경우가 많다. 헨리 8세처럼 구리 위에 얄팍한 은(銀)을 입힌 가짜 은화를 발행해 국민을 속였던 황제는 '늙은 구리 코'란 부끄러운 이름을 남겼다. 명작 '4계(季)'를 작곡한 비발디는 '붉은 옷의 신부(神父)'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열다섯 살에 신부가 된 비발디가 붉은 사제복을 즐겨 입어 얻은 우호적인 이름이다. 반대로 자기 나라 해군을 '해적'이라고 그린 만화책을 뿌리고 다니다 중학생에게 폭행 혐의로 고소당한 신부는 뭐라 불러야 할까.

그처럼 사람들은 이런저런 이유나 욕망으로 자신의 이름을 좋은 이미지로 남기려 하지만 세상은 바보가 아니어서 그 사람의 치적과 언행의 됨됨이를 보고 걸맞은 이름을 붙여 평가한다. 남이 붙인 별명조차도 따져보면 좋든 나쁘든 다 자기 스스로가 그렇게 불리게끔 만든 이름들이다. 선거철 길거리에 나붙은 수많은 이름과 자화자찬의 수식어들도 결국엔 남(유권자)이 어떻게 봐주느냐에 따라 평가가 갈리게 돼 있다. 다 된 공천이 하루아침에 수년 전 했던 말 한마디 때문에 뒤집히는 것도 그 이름이 세상과 남에 의해 상처받은 경우다.

이순(耳順)을 넘어서 나서지 말아야 할 곳이 선거판이란 말이 있지만 멀쩡한 이름도 선거판에 올려놓으면 자신도 모르는 온갖 뒷얘기들이 이름 뒤에 갯바위에 따개비 붙듯 붙어서 봉변당하고 욕을 보게 된다. 별것 아닌 이름 하나 지키기도 어려운 거친 세상임에도 오늘 또 수많은 후보는 새벽부터 명함을 들고 네거리를 누빈다. 하기야 백지와 붓, 벼루만 두고 출타하면 손님이 찾아왔다가 이름 석 자 적어 넣고 돌아가는 세칭 세함(歲銜) 풍속이 있었던 시대에는 공자님도 명함을 쓰셨다지만 이번 선거 끝날 동안 유권자들은 좋든 싫든 수많은 명함을 받아 봐야 한다. 그리고 그 이름 뒤에 담긴 진실, 신뢰와 희망을 가려서 뽑아야 한다. 지난 선거 역사에서 당의 공천과 명함 속의 이름값만 믿고 찍었다가 부패와 이념적 배신을 당해본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번 선거도 예외 없이 본 게임이 시작도 되기 전에 여론 조작으로 사퇴한 후보 이름, 공천 미끼 뇌물 의혹 측근 이름 등 추한 이름들부터 판을 친다. 이제 딱 보름 남았다. 숱한 이름 속에서 어떤 이름을 가려내야 할 것인가.

공천은 공천 권력자들의 생각일 뿐, 뽑는 건 유권자 맘이다. '실패한 공천'이란 평가 속에 치러지는 이번 선거에서 대구시민들, 과연 무소속'비(非)보수 후보를 몇 명이나 뽑아줄까. '비새누리당 뽑아주기 '…. 언젠가 한 번쯤은 풀어볼 필요가 있는 해묵은 지역 정치판의 숙제다.

김정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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