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살던 고향은] 37)동시인 신홍식의 구미 원평동

입력 2012-03-17 07:16:23

고향은 그리움 위에 빛바랜 한 장의 흑백사진

내 고향은 구미시 원평동. 고향집이 시장통 입구에 위치한 터라 장날만 되면 친척들의 휴게소로 변해 왁자지껄했다. 당시 신작로이자 시장통이었던 이곳은 현재 중앙시장으로, 유년시절 할머니댁에 사탕 심부름하던 추억이 새록새록 되살아난다.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내 고향은 구미시 원평동. 고향집이 시장통 입구에 위치한 터라 장날만 되면 친척들의 휴게소로 변해 왁자지껄했다. 당시 신작로이자 시장통이었던 이곳은 현재 중앙시장으로, 유년시절 할머니댁에 사탕 심부름하던 추억이 새록새록 되살아난다.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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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교 시절 기차로 대구까지 통학했던 구미역. 6'25 직후 구미는 면소재지로 역사도 소규모였지만 지금은 인구 50만 명에 KTX가 정차하는 대도시로 변했다.
할머니 사탕 심부름으로 자주 오갔던 구미시 선기동 가암리에 위치한 탁청재사(濯淸齋舍). 이 재실은 할아버지의 후학들이 건립한 것으로 매년 4월 19일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
할머니 사탕 심부름으로 자주 오갔던 구미시 선기동 가암리에 위치한 탁청재사(濯淸齋舍). 이 재실은 할아버지의 후학들이 건립한 것으로 매년 4월 19일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
신홍식 동시인·(사)아트빌리지 대표
신홍식 동시인·(사)아트빌리지 대표

고향, 구미시 원평동은 대구에서 경부고속도로를 이용하면 북대구IC를 출발하여 20여 분 정도면 구미시와 왜관읍의 경계인 낙동대교를 건널 수 있다. 지척의 거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게 가깝지만 현실적으로 특별한 일이 없으면 찾을 수 없는, 그래서 더욱 애틋한 것이 고향이다.

대교를 건너면 왼쪽으로는 영남팔경 중의 하나요 남쪽의 금강산이라 일컬어지는 도립공원 금오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또한 국내 최대의 내륙 산업단지로 알려진 구미국가산업단지가 오른쪽에 자리하고 있다. 낙동강을 가운데 두고 삼성, LG 등 수많은 굴지의 기업들이 자리 잡고 있는 구미산업단지는 우리나라 수출의 10%를 차지하고 전자산업의 견인차 역할을 담당하면서 국가 경제의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구미시는 이 산업단지가 품고 있는 역동성과 진취성이 어우러져 어느 도시보다 활기가 넘친다.

어릴 적 한적한 면 소재지에 지나지 않았던 고향 구미시는 1978년 시로 승격된 이후 경제, 문화, 교육, 교통 등 도시로서의 완벽한 인프라를 구축한 인구 50만 명의 최첨단 도시로 나날이 성장하고 있다. 내가 자란 원평동도 어릴 적 흔적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했다.

5'16 직후 구미는 작은 면 소재지에 지나지 않았다. 고향 원평동에서 학교에 가려면 지금은 중앙시장으로 변한 신작로를 따라 경찰서 정문을 지나야 했다. 경찰서는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건물로 면에서는 제일 크고 웅장한 건물이었다. 경찰서 정문에는 항상 총을 멘 순경들이 지키고 있었다. 순경들은 당시 아이들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울던 아이도 순경 온다면 울음을 그치는 시절이었다. 장난을 치며 학교로 가던 아이들은 경찰서 정문 앞을 지날 때는 어느새 숨을 죽인 채 종종걸음을 걸었다. 지금도 어쩌다 경찰서 앞을 지나게 될 때면 나도 모르게 걸음이 빨라진다.

경찰서에는 남, 북으로 망루가 높이 서 있었다. 그 망루에서 정오가 되면 사이렌 소리가 울렸다. 당시 시계가 귀한 시절이라 그 사이렌 소리를 듣고 정오임을 인근 주민들은 알게 된다. 사이렌 소리에 맞춰서 논밭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잠시 쉬고 아낙네들은 점심 준비를 하여 논밭으로 나가곤 하였다. 긴긴 겨울밤에는 지금은 사라진 찹쌀떡, 메밀묵 장수의 '찹쌀떡 사려' '메밀묵 사려'하며 동네를 맴돌던 애절하고 정겹던 그 목소리도 통행금지 사이렌 소리에 통행금지되고 말았다.

우리 집은 시장통 입구에 있었다. 그러므로 내 유년 추억은 장날의 풍경과 늘 겹쳐 떠오른다. 장날만 되면 인근 마을인 '덤바우' '수점' '시무실' 등지에서 장을 보러 온 친인척들이 우리 집에 들러 쉬어 간다. 요즘으로 치면 휴게소 겸 만남의 장소였던 것이다. 모처럼 만나는 친인척들끼리 나누는 인정 어린 대화며 살아가는 이야기를 옆에서 듣는 것을 무척 즐겨 했다.

시장이 파할 무렵이면 모처럼 만난 친구들, 혹은 사돈 간에 나눈 술잔에 얼큰하게 취한 어른들이 고등어 같은 생선을 새끼줄에 묶어 들고 노랫가락을 흥얼거리며 저녁 연기 감도는 산허리를 돌아가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아른거린다.

장날 이튿날이면 어김없이 나는 오리(2㎞)쯤 떨어진 큰집으로 심부름을 가야 했다. 장날에 나온 간식거리, 박하사탕 같은 것을 엄마는 큰집에 계시는 할머니를 위해 준비해 두었다가 나에게 심부름을 시키시는 것이었다. 어린 나에게는 엄청나게 먼 길이었지만 싫다 하지 않고 꼬박 다녔다. 큰집에 도착하면 할머니는 '풍죽헌'(風竹軒)이라는 현판이 걸린 서당마루에 앉아 계시다가 나를 보고 환하게 웃으시면서 정겨운 목소리로 "상철(필자의 아명)이 왔나"하시면서 반갑게 맞아 주셨다. 할머니께서 돌아가신 지도 어느덧 40여 년이 흘렀다. 그러나 고향에 들를 때마다 할머니의 단아하시며 인자하시던 모습이 떠오른다.

'어머님이 사 주신/ 박하사탕/ 한 봉지// 징검다리 건너/ 논두렁/ 밭두렁 지나// 마루에 걸터앉아/ 하늘 속 추억을/ 훔쳐 보시는// 큰집/ 할머니에게/ 심부름 가는 날.'

- 졸시 '심부름'

'풍죽헌(風竹軒)'은 해방 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께서 후학들을 가르치시던 서당에 걸린 현판이다. 할아버지(신상덕)께서는 조선 말엽의 거유(巨儒)이신 간재(艮齋) 전우(田禹) 선생의 문하생이었다. 할아버지 호는 탁청(濯淸)이었는데 간재 선생께서 후래의 혼탁한 기질을 씻어 내려 본연의 밝은 본성을 밝히라는 뜻에서 내려 주셨다고 한다. 할아버지의 문집 '탁청유고'에 수록되어 있는 덕은(德恩) 송재직 선생의 서문에 "그 당시 일본이 동포를 협박하여 그들의 민적에 올리려 하자 탁청 선생은 앞장서 따르지 않아 곤욕을 당하기에 이르렀으나 끝내 조금도 굽히지 아니하였다"고 적고 있다.

할아버지께서는 인근 지역인 '선산' '금릉' '성주' 등지를 왕래하시면서 후학들을 가르쳤는데 배움을 받은 수가 200여 명에 달하였다. 할아버지의 후학들은 '청선계'를 조직하여 스승의 가르침을 계승하고 있다. 선기동 가암리에 재실과 유적비를 건립하였으며 매년 4월 19일 추모제를 지낸 지 올해로 53년이 되었다.

지척에 있는 고향이지만 바쁜 일상생활 때문에 불알친구들이 얼굴이나 자주 보자고 매달 한 번 갖는 저녁 모임에도 일 년에 두서너 번 참석하는 것이 고작이라 만날 때마다 원성이 자자하다. 갈 때마다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고향이 반갑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무분별하게 개발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솜처럼 부드러운 모래는 황금빛으로 반짝이고 버들피라미 줄지어 헤엄쳐다니던 번사뒤 실개천, 여름이면 해 지는 줄 모르고 친구들과 어울려 놀았던 그 실개천은 시궁창으로 변하였다. 동네에서 고개만 돌리면 눈앞에 다가서던 금오산은 아파트 숲에 막혀 보이지 않는다. 고려 말 야은 길재 선생은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없다"하셨지만 지금 내 고향 산천은 그 시절 그 모습이 아니다.

실제의 고향은 옛것이 남아 있지 않는데도 대구로 돌아오는 내 가슴에는 그 시절, 그 모습만 가득 담겨 있다. 누구에게나 고향에 대한 추억은 그때 그 시절 그리움 위에 빛바랜 한 장의 흑백사진이다.

신홍식 동시인·(사)아트빌리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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