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 나루 통해야만 외지로 나갈 수 있었던 산골 마을
옛날에는 버스를 타고 낙동강 나루터를 건너야만 구미나 상주로 통했던 조그마한 시골 마을이 내가 태어난 구미시 도개면 용산리이다. 요즘에도 내가 살던 빈집과 논밭, 고향 친척들이 있고, 조상 산소가 있어 일 년에 몇 번 가끔 들르는 고향마을이다. 고향에 가서 빈집을 볼 때마다 옛날 할머니와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누나와 동생이 오순도순 살던 시절이 생각나곤 한다.
◆초등학교 시절 서울 전학
내 고향은 현재 사통팔달로 통하는 마을이 되었지만, 예전에는 낙동강 나루를 통해야만 서울로 통했던 산골 마을이었다. 지금은 구미시 도개면에 편입되었지만, 1960년대에는 마을의 반쪽이 각각 선산군 도개면과 의성군 단밀면에 속하는 행정구역 경계마을이었다. 그래서 한마을 친구들도 반은 의성군 낙정으로, 반은 선산군 도개로 초등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집에서 초등학교까지는 10리길(4㎞)이나 되었지만 매일 걸어다녔다. 다행히 같은 학년 친구들이 마을에서 약 10여 명이나 되었기에 즐겁게 다닌 기억이 난다. 그 당시 아버지가 서울에서 사업을 하여 성공한 관계로 나는 초등학교 5학년인 1960년대 중반에 서울 동대문에 있는 숭신초등학교로 전학을 갔다. 시골 촌놈이 서울에 가서 기차나 전철을 타보고 서울의 맛있는 음식을 먹어보니 어리둥절하여 어떻게 초등학교를 보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1960년대의 김천역 추억
그 당시 고향마을에서 서울에 가려면, 낙동강 낙동나루터에서 강을 건너 버스를 갈아타야 했고, 상주에 가서 다시 기차로 김천역까지 간 다음, 다시 김천역에서 경부선철도를 타고 서울까지 갔었다. 아침 일찍 집에서 출발하면 밤 10시경이 되어야 서울에 도착하곤 했다. 경부선 철도가 연착이라도 되면 김천역 인근에서 숙박을 하기도 했다. 방학 때 서울에서 시골집에 갈 때 아침 일찍 출발해도 밤 10시경이 되어야 집에 도착하곤 했다. 특히 상주에서 낙정나루터를 건너면 캄캄한 밤 8시경이 되는데, 고향 집에까지 가려면 배를 건너고 나서도 10리길인데, 큰 고갯길까지 넘어야만 했다. 그때는 어린 시절이라 달이 밝은 밤은 덜했으나 그믐에는 캄캄하여 지척을 분간하기 어려웠고, 지나가다가 짐승 소리만 나도 놀라 머리카락이 곧추서곤 했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한 생각이 든다.
그 후 마을 아래편 도개면에 일선교 다리가 1967년에 건설되어 선산을 거쳐 김천역을 통해 서울로 가게 되어 교통이 보다 더 편리해졌다. 1986년에는 낙동나루터에 낙단교가 건설되어 상주로도 교통이 편리하게 되었다.
◆낙동강 나루와 낙단보
낙동나루터는 현재 상주시 낙동면과 의성군 단밀면을 연결하는 곳에 있는데, 구미시 옥성면과 도개면이 바로 인접해 있는 곳이다. 해방 전까지만 해도 부산에서 올라온 소금배가 낙동강을 거슬러 안동과 예천까지 가던 건널목 역할을 했다. 옛날부터 낙동나루터인 상주시 낙동과 의성군 낙정은 강물이 투명하고 깊어 천혜의 교통과 전략 요충지였다.
낙동나루는 한때 낙동강의 최고 최대 상권을 자랑한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원산, 강경, 포항과 함께 4대 수산물 집산지였다. 과거 뱃길이 열려 있었을 때 부산 구포에서 상주 낙동나루까지의 뱃길이 700리였는데, 낙동강 700리라는 말은 여기에서 나왔다.
1960년대 낙동나루터에 띄운 배는 큰 목선이었다. 상주군청에서 소유'관리하고, 민간인이 운행권을 따서 운행했다. 그 당시 상주~대구, 상주~안계 등을 왕복한 버스가 주로 이용했다. 배에는 사람이 많이 타면 최대 500명가량 탔고, 버스 2대가 들어갔으며, 택시 같은 작은 차는 한꺼번에 12대까지 실었다. 낙동나루에 다리를 놔달라는 민원이 수없이 제기됐지만, 건설되지 못하다가 어렵게 1986년 8월 낙단교가 개통되었다. 그 후 낙단교 바로 아래에 4차선 산업도로가 건설되면서 또 하나의 다리가 건설되었다. 최근에는 상주-영천 간 민자 고속도로도 낙동나루터 위를 통과한다고 하니 낙동나루터 인근의 다리는 3개로 늘어날 전망이다. 옛날을 회상하면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최근에는 낙동강 살리기사업으로 추진한 낙단보가 건설돼 관광과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낙동나루에는 단밀면 낙정리 쪽 강변에 관수루(觀水樓)라는 누정이 있다. 한때는 밀양 영남루, 안동 영호루와 함께 낙동강 3대 루로 꼽힌 명루였다. 고려 중엽에 처음 지어져 조선조에 몇 차례 중수되었고 고종 11년(1843)에 대홍수를 만나 떠내려간 것을 1990년에 복원하였다. 관수루 누각에는 이규보, 주세붕, 김종직, 김일손, 권오복, 이황 등 일세를 풍미한 문인들이 낙동강을 노래한 시 10편이 걸려 있다. 이들은 시대를 달리하며 낙강시제(洛江詩祭)를 열었다고 한다.
◆신라 최초의 불교 전례지-도개면 모례정
신라에 불교가 처음 전해진 곳은 오늘날 구미시 도개면 도개(道開)리이다. 도개는 '도(道)를 처음 연(開) 곳'이란 의미가 깃들어 있다. 모례정은 신라 최초의 불교 신자인 모례(毛禮)의 집 우물이다. 고구려 사람 아도가 신라 눌지왕 때 모례(또는 모례장자) 집에 머물며 신라에 불교를 처음 전했다. 아도로 인해 전해진 신라 불교는 572년 법흥왕 14년 이차돈의 순교로 공인되면서 꽃피웠다. 아도가 처음 불교를 전파하던 그때 사용됐던 우물로 추정되는 모례정과 모례의 집터가 아직 보존돼 있어 아득한 옛날을 회상케 하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 승려인 아도는 신라에 불법을 전하기 위해 고구려와 국경을 맞대고 있던 선산으로 몰래 들어와 도개의 모례 집에서 낮엔 머슴살이를 하고 밤에 포교했다고 한다.
도개면 인근 해평에는 신라 최초의 가람으로 알려진 도리사가 있다. 아도화상이 후일 눌지왕 때 도리사에서 손가락으로 가리킨 지역에 사찰을 지으니, 이 절이 유명한 김천 직시사라는 이야기도 전해져 오고 있다.
◆우리 모두의 고향- 농촌을 살리는 길!
오늘날 50대 이상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향이 시골인 경우가 많다. 최근 시골 마을은 빈집이 늘어나고, 젊은이들은 도시로 빠져나가 피폐해지는 경우가 많이 있다.
최근 일본의 농촌마을을 둘러볼 기회가 있었는데, 일본에는 미치노에키(도로의 역) 농산물직판장이 중간 중간에 있어 각 고장의 특산품을 홍보하고 판매하는 것을 보았다. 주요 국도변에 시에서 투자하여 대지를 마련한 다음, 농산물직판장을 지어주고, 운영은 해당 지역 농민단체나 농업조합에 위탁함으로써 농민들이 생산한 제품을 팔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시'군에서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국도변 주요 지역의 토지를 이용하여 농산물(또는 특산품)직판장을 건설한 다음, 싼값에 해당 지역 농민단체나 농민조합에 임대하여 중간 상인 없이 지역 농산물이나 특산품을 팔게 한다면, 농촌의 특산품 판매가 보다 잘될 것으로 생각된다. 중앙정부는 도로공사의 휴게소 사업을 전면 개편케 하고, 시'군에서는 선진국의 마을 만들기 사업이나 그린투어리즘과 같은 성공 사례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우리 농촌을 활성화시켜야 할 것이다.
이춘근 대구경북연구원 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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