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의 전후 상황 연구에 더없이 귀중한 자료로 이순신 장군이 남긴 '난중일기'와 함께 서애 류성룡이 쓴 '징비록'을 빼놓을 수 없다. 징비록(懲毖錄)은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豫其懲而毖後患)는 시경(詩經)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임진란 당시 영의정으로 도체찰사를 겸하며 사실상 전쟁을 지휘했던 서애는 퇴임 후 고향인 안동 하회로 돌아와 징비록을 집필했다. 다시는 임진란과 같은 참담한 역사가 되풀이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참회와 염원에 따른 것이었다.
징비록은 그래서 오늘날의 고위 공직자나 정치인들처럼 은퇴 후 국정에 몸담았던 시절의 소감을 돌이켜보는 회고록과는 그 성격이 다르다. 징비록은 반성문이다. 온 나라가 무방비 상태에서 왜군에게 유린당했던 미증유의 대전란 한복판에서 국정을 총괄하고 전쟁을 진두지휘하며 그 치욕을 온몸으로 겪었던 서애가 뼈를 깎는 심정으로 쓴 반성의 기록인 것이다. 징비록은 또한 왜적이 쳐들어올 것을 예견하고 권율과 이순신 장군 등 명장을 중용하도록 추천했으며, 화포 등 각종 무기를 제조해 성곽을 세우고 군비를 확충할 것을 건의한 내용도 담고 있다.
서애가 이렇듯 임진왜란 전후의 상황을 기록해 후환을 경계한 징비록의 원본은 국보 제132호로 안동의 한국국학진흥원이 소장하고 있다. 그런데 그 원본을 제외하고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보이는 목판본이 최근 구미에서 공개됐다. 이 징비록 목판본은 17세기 중반 서애의 외손 조수익이 경상감사로 부임해 간행한 것이라고 한다. 특히 이번 목판본 공개는 임진란 7갑주년에 맞춘 것이어서 더욱 뜻깊다. 올해가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420년(60년×7)이 되기 때문이다. 임진년에 되새겨보는 징비록의 의미는 그래서 각별하다.
서애가 징비록을 통해 조선에 남긴 메시지는 무엇이었을까? 과거에 대한 성찰과 내일을 위한 대비가 없는 나라의 역사는 뼈저린 실패를 되풀이한다는 경고가 아니었을까. 그러나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300년(5갑 주년) 만인 1892년, 조선은 동학농민운동을 야기시키며 내우외환에 시달리다 결국은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한다. 서애는 우리가 얼마나 정세에 어두웠고, 준비에 소홀했는지, 그리고 그 결과가 얼마나 참담했는지를 생생하게 들려주고 있다. 그가 살아 돌아와 다시 찾아온 임진년의 이 혼란한 정국을 마주한다면 무슨 말을 할까?
조향래 북부본부장 bulsajo@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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