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웅의 노거수와 사람들] 의성인 김만근 선생과 안동 내앞의 개호송

입력 2012-02-23 14:48:04

풍수적 결함 보완 위해 조성…큰 인물들 배출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를 찾았다. 한자식 이름 천전(川前)보다 우리말 '내앞'으로 더 잘 알려진 곳이다. 이곳에 의성 김씨를 명문의 반열에 올린 분이 조성한 숲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내앞은 하회, 봉화의 닭실, 경주의 양동마을과 더불어 영남 4대 길지의 한곳이다.

의성 김씨가 이곳에 터를 잡은 것은 조선 전기 성종 때 망계(望溪) 김만근(金萬謹, 1446~1500)이 이거해 오고부터라고 한다. 비록 명당이기는 하나 청룡 백호 부분이 허했다. 공은 이 결함을 보완하기 위해 숲을 조성하여 비보(裨補)하니 이것이 바로 개호송(開湖松)이다.

예견한 바와 같이 훌륭한 인물이 많이 배출되었다. 그중에 우뚝한 분이 청계(靑溪) 김진(金璡, 1500~1580)이다. 재기가 뛰어나고 뜻이 높아 일찍부터 학덕이 높은 선비들을 찾아가 학문을 배웠다. 1525년(중종 20) 사마시에 합격했으나 이후 대과를 보기보다 자녀 교육과 후진 양성에 힘썼다.

극일(克一), 수일(守一), 명일(明一), 성일(誠一), 복일(復一) 등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3명은 대과, 2명은 소과에 합격해 이른 바 오룡지가(五龍之家)로 명성을 얻으면서 의성 김문(金門)을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특히 넷째 학봉(鶴峰) 김성일(1538~1593)은 퇴계의 수제자로 장흥효, 조정, 최현(崔晛), 신지제(申之悌), 권태일, 이민성(李民宬), 정영후 등 기라성 같은 제자를 배출하여 퇴계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임란 시 경상좌'우도관찰사, 초유사로 국난 극복에 앞장서서 활동하다가 순절하여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종택을 보기 위해 마을 한복판 고가가 있는 곳으로 향했으나 길을 잘못 들어 되돌아 나오다가 안내판이 있어 읽어 보았다. 만주 일대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옥사한 김동삼(1878~1937)의 생가였다. 사진을 찍고 나와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었더니 마을 좌측으로 가라고 했다. 국도변에 큰 글씨로 쓴 안내판이 있었으나 버스를 타고 와서 미처 보지 못했다.

종택(보물 제450호)은 마을 왼쪽 다소 떨어진 곳에 있으나 고풍스럽고 규모가 커서 한눈에 들어왔다. 학봉이 중국에 갔을 때 얻어온 도면으로 지은 집이라고 한다. 그날 따라 능소화가 만발해 양반가의 고상한 취향을 엿볼 수 있었다.

조성한 숲의 이름이 왜 '호수를 연다'는 뜻의 '개호'(開湖)인지 궁금했다. 거처하고 있는 분에게 물었더니 모른다고 했다.

1608년 대홍수 때 유실된 것을 청계공의 둘째 수일의 아들 운천(雲川) 김용(金涌, 1557~1620)이 새로 조성하고 잘 보존하기 위해 '개호금송완의'(開湖禁松完議)를 지었다고 한다. 원문을 접할 수 없어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벌채를 금하고, 필요할 경우 공동으로 잡초를 제거하거나 보살피기를 정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운천은 1590년 대과에 급제해 삼사(三司)의 여러 관직을 맡다가 임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안동수성장으로 활약했다. 후에 선무원종 2등 공신에 서훈되었다.

그러나 이곳도 천지개벽(?)이 일어나 임하댐이 건설되면서 인근의 일부 마을이 물속에 잠기고 내앞 역시 보조 댐으로 인해 큰 호수로 변했다. 즉 개호되고 이름에 걸맞게 호수 속에 섬처럼 떠 있게 되었다.

두 번째 개호송을 조성했던 운천공이 세상을 떠난 지도 400여 년, 만약 망계공 때라면 그보다 더 오래전인데 어떻게 해서 이 숲이 500여 년 후 호수 속에 놓여질 것을 예측하고 이름을 명명했는지 신비로울 따름이다.

선조들이 지은 땅이름이 그 후에 벌어진 일과 맞아떨어진 곳은 이곳 말고도 여러 곳이 있어 그 기묘한 선견지명에 후세들이 깜짝 놀라는 경우가 많은데 이곳도 역시 그런 곳이다.

종택을 나와 독립운동기념관도 둘러보았다. 선비마을답게 많은 독립운동가가 많이 배출되었다. 소위 사회지도층이라는 인사들이 그 알량한 지식과 자리를 활용해 탈법마저 자행하면서 사익을 챙기기 바쁜 오늘날의 세태와 대비해 볼 때 숙연함을 느꼈다.

반변천가에는 1㎞ 정도의 또 다른 숲 백운정숲이 있다. 1560년경 청계공의 장남 극일(1522~1585)이 평해군수로 있을 때 그곳에서 해송 묘목을 가져와 심은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해송은 단 한 그루도 없었다. 평해는 바닷가로 해송이 잘 자라는 곳이기도 하지만 우리나라의 대표 소나무라고 할 수 있는 금강송의 주산지인 만큼 해송이 아니라 금강송을 가져와 심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

내앞 일대는 아름다운 숲과 넓은 호수, 고색창연한 종택 등으로 인하여 우리나라 명승(제263호)으로 지정되었다. 이 집안에서는 대과 급제자 24인, 진사와 음직으로 벼슬한 사람이 80명, 문인학사가 150명 배출되었다고 한다. 정성을 다해 나무를 가꾸듯 인재를 길러냈기 때문일 것이다.

대구생명의 숲 운영위원(ljw167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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