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시간 30분·15회·181구…내 생애 최고"
1993년 10월 21일. 삼성 라이온즈와 해태 타이거즈의 한국시리즈 3차전이 예고된 이날 1만3천석 대구시민야구장 입장권은 매표개시 1시간 30분 만에 동이 났다. 삼성이 광주에서 1승1패를 한 터라 팬들은 대구 홈에서 호남의 기세를 꺾어 한국시리즈 우승에 한발 더 다가서 주길 간절히 바라며 입장권을 사려 몇 시간 줄을 서 기다렸다.
삼성도 이날 경기만 이기면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는 만큼, 반드시 이겨 잠실에서 우승 축포를 쏘자며 결의를 다졌다.
경기시작 직전 문희수를 선발투수로 낙점한 해태와 달리 삼성은 일찌감치 박충식을 점찍었다. 신인으로 14승을 거둔 광주상고 출신 박충식은 삼성의 실질적 에이스였고, 특히 고향 팀 해태에 강했다. 시즌 중 3승2패를 기록했지만 평균자책점이 1.79밖에 되지 않았다.
경기에 앞서 한차례 퍼부은 폭우가 걷히자 박충식은 촉촉이 물기를 머금은 마운드에 올랐다. 그리고 그날 박충식은 15회까지, 4시간 30분의 펼쳐진 혈투가 끝날 때까지 마운드를 내려오지 않았다. 그가 던진 공은 무려 181개였다. 혼을 불어넣어 던진 181구는 영원히 깨지지 않을 한국시리즈 최다 투구 기록으로 남아 있다.
해태가 문희수-선동열-송유석으로 이어지는 최고의 투수들을 잇달아 투입했지만, 박충식을 넘지 못했다. 결국 승부는 2대2 무승부로 마무리됐다.
0대1로 뒤지던 해태 김응용 감독은 3회초 1점을 뽑아 동점이 되자 선동열에게 몸을 풀 것을 지시했다. 3회말 삼성이 2사 1, 2루를 만들자 문희수를 내리고, 특급 마무리 선동열로 마운드를 바꿨다.
삼성 더그아웃과 관중석에서는 한숨이 터져 나왔다. '실점하면 진다'는 초조와 불안감은 삼성 더그아웃에도 흘렀다. 선동열은 존재감만으로도 상대를 기죽이는 그런 투수였다. 선동열에게 93년은 가장 빛났던 해다. 92년 부상 때문에 85년부터 91년까지 7년간 독식해왔던 평균자책점 타이틀을 내놓았지만, 그해 126.1이닝 동안 0.78이라는 놀라운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 세이브포인트는 41. 선동열은 어느 때보다 강해져 있었다.
우려는 현실이 됐다. 6회초 해태 홍현우가 솔로 홈런을 치며 승부는 1대2로 해태로 기울었다. 그러나 곧바로 함성이 터졌다. 6회말 선두타자 3번 강기웅이 중전안타를 때려냈다. 양준혁이 땅볼, 김성래가 삼진을 당하며 무산되는 듯했던 찬스는 6번 이종두의 방망이로 균형을 맞췄다. 좌중간 펜스를 맞는 2루타. 볼카운트 2-1에서 선동열이 급한 승부를 한 게 삼성으로선 더없는 호기가 됐다.
한 번의 큰 파도를 넘은 양팀은 전광판에 '0'만 그렸다. 승부는 정규이닝을 넘어섰다. 10회말이 끝나자 삼성 응원단에서는 다시 한 번 환호가 터졌다. 호투하던 선동열이 마운드를 내려온 것이었다. 쌀쌀한 날씨 속에 선동열은 92년 부상 이후 최다인 101구를 던졌고, 다음을 기약하면 마운드를 내려왔다.
이젠 박충식과 송유석의 대결. 승리의 기대감은 삼성 쪽으로 급격하게 넘어갔다. 당시 투수코치였던 권영호 삼성 스카우트 코치는 "그날 박충식의 싱커가 매우 좋았다. 꼭 이겨야 하는 경기였기에 잘 던지던 박충식을 그대로 밀어붙였다. 선동열이 내려간 뒤엔 바꾸려 했다. 류명선이 불펜에 대기하고 있었다. 마운드에 올라 '괜찮으냐?' 물으니 죽어도 던지겠다고 해 공을 넘겨받지 못하고 마운드를 내려와야 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삼성은 13회말 1사 2루의 끝내기 기회를 잡았지만 강기웅과 양준혁이 범타로 물러났다. 삼성은 더 이상 틈을 찾지 못했다. 해태도 마찬가지였다.
오후 6시 1분에 시작된 경기는 10시 31분에 종료를 알렸다. 4시간 30분의 공방은 무승부로 선언됐다. 박충식은 아쉬움 가득한 표정으로 마운드를 걸어 내려왔다.
삼성은 4차전서 해태를 8대2로 누르고 2승1무1패로 앞섰으나 5차전에서 해태 조계현에게 완투패를 당했고, 6차전에서 문희수-김정수-선동열로 이어진 해태 마운드를 넘지 못했다. 탈락 위기에 몰린 삼성은 3차전 181구 이후 4일밖에 쉬지 못한 박충식을 어쩔 수 없이 7차전 선발로 올렸다. 하지만 그의 컨디션은 정상일 수가 없었다. 그 사이 싱커에 대한 적응력을 키운 해태 타자들의 맹공 속에 박충식은 4.2이닝 2실점으로 물러났다. 그리고 삼성은 또다시 해태를 넘지 못했다.
박충식은 다음 해인 94년(14승) 이후로도 다섯 시즌 연속 10승 안팎을 거두는 등 팀의 중심투수로서 역할을 다했다. 2002년 시즌이 끝나고 33세의 나이로 정든 유니폼(KIA에서 은퇴)을 벗었을 때 야구인들과 팬들은 93년의 181구가 선수생명을 단축했다고 안타까워했다. 권영호 스카우트는 "(박)충식이를 볼 때면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럴 때면 충식이는 선수로서 '생애 최고의 순간'을 간직했으니, 오히려 영광이었다며 위로를 한다"고 말했다.
최두성기자 dscho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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