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1-작은 희망의 발걸음
"마땅히 가져 올 것이 없어서 귤을 좀 사왔습니다."
"아이고, 뭐 이런 걸 다 가져오세요, 하 선생님. 누추하지만 들어오세요. 커피라도 한잔 하고 가세요."밤 9시, 꽤 늦은 시간이지만 나는 불쑥 남의 집을 방문한다. 방문한 곳은 남자 3명이 사는 어느 주택의 창고방. 이곳에 내가 근무하고 있는 대구의료원 알코올상담센터의 회원(알코올 의존증 환자)이 살고 있다.
나는 작년 초부터 알코올상담센터를 맡으면서 한 달에 2, 3번 정도 회원들의 가정을 방문, 상담을 하고 있다. 알코올상담센터 회원들 대부분 가정이 깨지거나 형편이 좋지 않은 분들이 많아 방문할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과 무거운 책임감이 밀려온다.
나는 1시간 전 이 씨의 전화를 받았다.
"선생님, 전데요. 제가 퇴원한 바로 그날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했어요. 마음으로는 마시고 싶지 않은데 자제가 안돼요. 도움을 청할 사람이 하 선생님밖에 없어서 이렇게 늦은 시간에 전화합니다.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좀 도와주세요."
전화를 받자마자 바로 이 씨의 집으로 달려갔다.
집안에 들어서자 이 씨와 거동을 거의 하지 못할 정도로 몸이 불편하신 이 씨의 아버지와 고등학생 아들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저녁은 드셨어요?"
"네, 뭐 대충요. 하 선생님은 저녁 드셨어요?"
저녁을 먹었다고 하는데 오랫동안 밥을 해 먹은 흔적이 없는 듯 보였다.
이 씨는 오랜 기간 알코올 의존증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반복되는 정신과병동 입원과 퇴원으로 부인과 헤어지고 다니던 직장도 잃게 되고 현재 아버지, 아들과 기초생활수급대상자로 조금의 지원을 받으며 근근이 생활하고 있는 형편이다.
전화 받은 일 없었던 것처럼 이런저런 안부를 물으며 이 씨의 손을 꼭 잡았다. 이 씨도 내 손을 힘주어 꽉 잡았다.
나는 알코올상담센터 회원들의 가정을 방문하면서 이들이 물질이 없어서 힘들기도 하지만 이들을 더 힘들게 하는 것들이 사회적인 무관심과 냉대라는 생각이 든다. 마음을 다잡아 고쳐먹고 노력해보지만 자신에게 돌아오는 손가락질과 수군거림을 더 못견뎌하는 모습을 자주 본다. 비록 내가 이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찾아와서 손잡아주는 사소하고 조그만 것일지라도 이들을 향한 작은 희망의 발걸음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나는 잡았던 손을 놓으며 이 씨의 집을 나선다.
하동인(대구 서구 평리4동)
♥수필2-바밤바
아주 오래전, 초등학생 부잣집 딸인 친구 생일잔치 갔다 온 날. 내 생일도 몰라주는 엄마가 섭섭해 온몸으로 투덜거렸다. 사는 게 바빠 당신 생일도 못 챙긴다는 걸 그땐 몰랐다. "옜다! 이거나 먹어라"하면서 모기장 안으로 밀어 넣어준 바밤바 2개 짐짓 화난 척, 안 먹는 척 돌아누워 있었지만 바밤바가 녹아버릴까 봐 삐친 척도 오래 못하고 엄마 하나 먹어봐 소리도 않은 채 막대까지 핥아가며 아쉬움을 핥아먹은 기억이 난다.
세월이 흘러 법정 스님의 글에서 바밤바에 얽힌 추억을 읽은 적이 있다.
도반스님들과 대중목욕탕을 다녀온 후에 먹었던 바밤바는 너무도 달고 맛있었다고. 스님과 아이스크림 언뜻 조화가 안 되는 듯도 했지만 같은 아이스크림을 좋아한다는 게 신기해 법정 스님과 바밤바를 더 좋아했던 시절이 있었다.
첫아이가 네 살 무렵이었나? 여름날 외출에서 돌아와 사준 아이스크림이 바밤바였다.
녹아서 똑똑 떨어지기 시작하는 아이스크림에 마음이 급했는지 방에 들어오는 것도 잊은 채 현관에 돌아앉아 너무도 맛있게 먹던 아이의 뒷모습. 무척 사랑스러웠던 그 뒷모습은 아름다운 실루엣으로 지금도 기억에 남아있다. 나이가 들어가니 예전에는 좋았던 많은 것들 중 지금은 그렇지 않은 것들이 더 많다. 바밤바도 그중 하나가 되어 버렸다. 하지만 그 추억만큼은 세월이 더해 갈수록 새록새록 새로워지는 것 같다.
한겨울, 남편이 들고 들어온 때아닌 아이스크림 보따리 속에서 삐죽이 고개 내민 바밤바를 보니 옛 추억들이 줄줄이 따라나와 잠시 행복에 젖어 보았다.
김경희(대구 남구 대명3동)
♥시1-지금은 지겨운 이야기
아버지 입속에 쓴 액체가 들어갈적마다
약방에 감초마냥 등장하는 이야기 있지
당신 어릴적 소를 끌고 배고팠던 시절
형제누이 많은지라 학교를 저버려야한 시간들
아무리 재청취해도 깊이 와 닿지 않고
외국어마냥 귓가에 맴도는 먼 옛날이야기
우리가 지금을 감사히 살게 하는 사실임에도
우리가 언제나 기억해야 할 전통임에도
오늘도 나는 그것이 지겨운 훈계 같다
먼 훗날 내가 부모가 되어
그 옛 이야기 그리워지는 때가 오면 어쩌지
지금은 지겨운 아버지의 어릴 적 이야기
기유미(대구 동구 신암4동)
♥시2-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결코, 잠을 잔 적이 없는 어머니의 부엌에서
흙냄새가 훅 불어왔다.
삶의 파란을 꼭 쥔
손 주름에는
두 아들을 내 인생의
보석이라 자랑하던
코엘리아의 삶을 꿈꾸었던 어제가 녹아 있다.
낙엽이 된 어머니의 시(時)는 오늘이 되어
가을의 향기를 피운다.
자랑이 자랑이 되지못한
자랑을 아직도 자랑스러워하는
그 시(時)는 내일을 그리워하게 한다.
어머니의 품속에서 훅 불어오는 흙냄새는
무량무변(無量無邊)
김창근(포항시 북구 대신동)
※지난주 선정되신 분은 최무용(대구 북구 동천동) 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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