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幹 숨을 고르다-황악] 4.우두령(질매재)∼여정봉∼바람재∼비로봉

입력 2012-01-20 07:36:42

여정봉 운해 뚫고 아침 졸음에 겨운 금오산·가야산이 기지개

황악산 여정봉에 오르자 백두대간 능성들이 줄지어 도열하고 있다. 맑은 햇살을 받아 구름위로 멀리 가야산이 보인다.
황악산 여정봉에 오르자 백두대간 능성들이 줄지어 도열하고 있다. 맑은 햇살을 받아 구름위로 멀리 가야산이 보인다.
흰 눈 위에 앙증맞게 수놓아진 토끼발자국이 등산객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흰 눈 위에 앙증맞게 수놓아진 토끼발자국이 등산객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우두령 터널에서 본 황악산 산줄기.
우두령 터널에서 본 황악산 산줄기.

올겨울은 유난히 삼한사온 현상이 뚜렷하다. 어릴 때 기억으로는 겨울 날씨는 며칠 춥다가 또 며칠은 따뜻한 날이 계속됐었다. 그런데 몇 해 전부터 겨울 날씨는 추위가 계속되거나 겨울인데도 눈이 오지 않거나 했다. 온실효과에다 '엘니뇨' '라니냐' 등 기상이변으로 지구촌의 기후가 바뀐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올겨울 날씨는 예전의 삼한사온을 되찾은 모습이다. 주중에는 다소 포근하다가 주말이면 꼭 날씨가 추워진다. 백두대간 황악산을 찾은 날은 오전 9시를 넘겼는데도 기온이 영하 13℃를 가리킨다. '소풍 가려니 비가 온다'는 말처럼 '머피의 법칙'인가? 산에 오르려고 하니 꼭 날씨가 추워진다.

우두령 터널에서 차를 내려 백두대간 종주길로 황악산을 오른다. 우두령은 김천 구성면과 충북 영동 상촌면을 연결하는 고갯길이다. 우두령은 우등(소의 등)령이 구전(口傳)되다 변해 우두령으로 불리게 됐다고 길옆의 표지석이 알려준다. 그러나 인근에서는 질매재라고 더 많이 불린다. 질매는 농촌에서 소가 짐을 맬 때 등에 올리는 농기구다. 국민들의 심금을 울렸던 이충렬 감독이 제작한 다큐멘터리 독립영화 '워낭소리'에서 팔순 촌로가 소에 질매를 걸치고 쟁기로 밭을 갈던 모습이 떠오른다.

◆순백의 향연, 가지 않은 길

산길로 접어들자 며칠 전 내린 눈으로 어디가 길인지 분간할 수 없다. 온통 눈밭이다. 길가에서 신발에 미끄러지지 않게 아이젠을 하고 눈이 신발'옷 속으로 들어가지 않도록 보호대(스패츠)를 착용한 후 길을 나선다. 이날 산행은 길 안내를 자청한 김천산악연맹 회원들이 동행했다.

본격 등산로로 접어들자 쌓인 눈이 무릎까지 올라온다. 앞에서 길을 내고 뒤는 눈 위에 난 발자국을 따라 걸음을 옮겨놓는다. 이정표에는 황악산 정상까지 7천m라고 적혀 있다. 길 한쪽에는 새집 모양을 한 스탬프 보관장소가 있다. 산악회 회원이 이를 둘러싼 재미있는 얘기를 들여준다. 지난해 봄에 이 길로 산행에 나섰는데 산새가 이 안에서 집을 짓고 알을 품고 있었다는 것. 얼마 후 다시 이곳을 찾으니 새끼가 알을 깨고 나와 어미가 물어다준 먹이를 먹었는데 한 달쯤 지나서 와보니 새 가족이 날아가고 없었다고 말한다. 신기한 마음에 다가가 스탬프 보관함을 들여다보니 새집 흔적이 남아있지 않다.

오르막길을 30여 분 오르자 첫 산봉우리에 닿는다. 딱히 이름이 붙여지지 않았다. 주변을 살펴보니 사방이 눈 천지다. 가야 할 길은 아직 멀다. 봉우리에서 황악산 정상을 올려다보자 아직 까마득하기만 하다. 문득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詩) '가지 않은 길'이 떠오른다.

'노랗게 단풍 든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더군요/ 몸이 하나니 두 길을 가보는 나그네가 될 수는 없어/ 나는 서운한 마음으로 한참 서서/ 덤불 숲 속으로 굽어드는 한쪽 길을/ 멀리 시선이 닿는 데까지 바라보았습니다.'

뜻하는 의미는 다소 다르지만 아무도 가지 않는 순백의 길을 간다니 왠지 모를 흥분과 희열이 느껴진다.

◆천년 암자를 품은 삼성산

능선을 따라 눈길을 헤쳐 나가니 오른쪽은 경상도요, 왼쪽은 충청도다. 산 능선에 경계를 치고 구분했지만 경상'충청 주민들은 예부터 산을 넘나들며 빈번한 왕래를 하고 혼인을 하는 이웃사촌이다. 오히려 경계를 둠으로써 마음이 멀어지지 않았나 생각한다. 능선을 오르고 내리기를 여러 차례 삼성산(985m)이 반긴다. 삼성산 아래에는 직지사 삼성암이 있다. 산 이름이 천덕산으로 불리기도 한다. 신라말 고승인 도선국사가 지리산에 조성된 약사여래 삼불을 모실 명당을 물색하다 금오산과 수도산, 천덕산(삼성산)을 택한 후 약사암, 수도암, 삼성암을 각각 짓고 세 분 약사여래를 봉안했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마침 점심 공양시간이 다가온 때문인지 스님의 독경소리가 산봉우리까지 똑똑히 들린다.

길을 재촉하니 눈 위 상당한 크기의 짐승 발자국이 선명하게 찍혀 있다. 모양으로 보아 지나간 지 얼마 되지 않은 듯하다. 최근 이곳 주변에서 큰 짐승이 발견된 적이 없다. 우리나라 호랑이'표범 얘기는 1962년 가야산에서 표범을 생포해 창경원으로 옮겼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후에는 공식적으로 사라졌다. 삵이나 오소리 발자국일 것이라는 게 일행의 말이다. 몇 년 전 부항댐 부근에서 밤에 호랑이를 봤다는 얘기가 있으나 풍문일 뿐이다. 조금 나아가자 토끼 발자국이 눈에 밟힌다. 눈에 찍힌 발자국 모습이 무척이나 앙증맞다. 최근 야생고양이가 설쳐 산토끼를 거의 볼 수 없는데 이곳에는 여러 마리가 뛰어다닌 흔적이 있다. 평소에는 보기 힘들지만 눈이 가져다준 행운이다.

산행을 하면서 주위 산을 둘러보니 여기서는 소나무는 거의 찾을 수 없고 대부분 참나무 등 잡목이 주를 이룬다. 그래서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 더욱 춥게 느껴진다.

김천산악연맹 이정배 회장은 "중학교 때인 1970년대에 이곳 산에 소나무 병이 돌아 소나무들이 고사해 전멸했다"고 한다. 그나마 남아 있던 소나무를 벌채해 지금은 참나무가 대부분 산을 덮고 있다는 설명이다.

◆신기루를 펼쳐보인 겨울산

이야기와 눈에 취해 걷다가 다다른 곳이 여정봉(1,034m)이다. 봉우리에 오르니 사방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동안 눈이 오거나 안개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주변 산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동쪽으로 금오산이 운해를 건너 다가올 듯 보인다. 남쪽으로는 가야산이 구름 위에서 위세를 뽐내고 있다. 서쪽으로 민주지산이 자리하고, 북쪽으로 백두대간 마루금이 쉼 없이 펼쳐진다. 장관이다.

북쪽 마루금을 바라보는데 하늘과 마루금을 경계로 수평선도 지평선도 아닌 선(線)이 쳐져 있다. 푸른 하늘과 경계로 아래는 바다에 검은 먹물을 약간 쏟아 놓은 듯한데 옅은 먹물에 산들이 잠겨 있는 모습이다. 추운 겨울날 기온과 기압의 영향으로 펼쳐진 신기루다. 좀처럼 보기 힘든 현상이라는 일행의 설명이 이어졌다.

여정봉에서 바람재로 향하는 길은 내리막길이다. 무릎까지 쌓인 눈이 만약 스키장이었다면 환상의 슬로프로 인기를 누리겠다. 급경사를 내려오는데 여간 힘들지 않다. 미끄러지며 스키를 타듯 내려온 곳이 바람재다. 백두대간 준령에서 골짜기를 따라 불어온 바람이 황악산을 비껴 돌아 비교적 낮은 이곳으로 몰려들기 때문에 사시사철 바람 잘 날 없다는 곳이다. 바람재 아래에는 대규모 목장 터가 있다. 하지만 몇 년 전부터 방목을 접고 방치되고 있어 황량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산의 품에 안겨

바람재를 지나면 높은 봉우리 2개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모습을 드러내는데 형제봉(920m)이다. 마침 이곳에서 황악산에서 내려오는 등산객과 만난다. 4시간여 눈길을 걸으면서 산꾼을 만나기는 처음이다. 운수봉~황악산을 내려오는 길이라며 정상 비로봉이 멀지 않았다고 힘을 북돋워준다. 형제봉에는 신성봉을 통해 능여계곡을 거쳐 직지사로 내려가는 등산로가 있다.

황악산 비로봉에 닿으니 운수봉을 통해 올라온 등산객들이 반갑게 맞아준다. 5시간 눈과의 사투를 벌인 끝에 다다른 정상이다. 정상에서 사방을 둘러보니 맑게 갠 하늘 덕분에 더욱 아름다운 경치를 선물한다. 끝없이 펼쳐지는 산들이 정상에 오른 행복감을 더해준다. 장윤우 님의 시(詩) '산에 안겨'가 떠오른다.

'산은 언제고 어려웠다/ 바다의 곧은 톤(tone)에 비하면/ 언제 변할지 모르는/ 무쌍한 뜻은/ 내겐 어려운 질문이었다/ 1월(6월)의 산에 앉아/ 日沒(일몰)의 붉은 하늘을 보며/ 몸에 마음에 물들이던/ 젊은 날/ 꿈은 지워지고/ 다시 산에 빠지는 이유를/ 묻는 이 없지만/ 있을 곳에 반드시 있었고/ 없는 곳에도 무언가 숨겨놓는/ 어진 산의 헤아림을/ 천년이 오간들/ 뉘 아랴/ 산에 엎어져 그냥 울고 싶다/ 마냥 잠들고만 싶다.'

글'박용우기자 ywpark@msnet.co.kr 사진'서하복작가 texcaf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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