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th 라이온즈 열정의 30년] (26)우용득의 세대교체

입력 2012-01-16 08:41:29

호쾌한 공격야구…50만 관중시대 활짝

1993년 9월 9일 대구구장 관중이 사직을 제외하고 지방구장으로는 처음으로 50만 명을 넘어섰다. 대구시민야구장을 가득 채운 팬들이 삼성을 응원하고 있다. 삼성 라이온즈 제공
1993년 9월 9일 대구구장 관중이 사직을 제외하고 지방구장으로는 처음으로 50만 명을 넘어섰다. 대구시민야구장을 가득 채운 팬들이 삼성을 응원하고 있다. 삼성 라이온즈 제공

1990년대 들어 삼성 라이온즈는 강팀의 이미지를 잃기 시작했다. 가을 야구에 초청장을 받았지만, 우승은 여전히 잡히지 않는 구름 같았다. 인기도 시들어만 갔다. 1990년 43만6천 명을 야구장으로 불러들이며 홈 관중 40만 명 시대를 열었지만, 호쾌함을 잃은 야구에 팬들은 발길을 돌렸다. 관중 수는 1991년 35만7천 명, 1992년 31만5천 명으로 줄어들었다. 안팎으로 삼성은 변화를 종용받았다. 삼성이 고심 끝에 빼내 든 카드는 또 한 번의 감독교체였다. 삼성은 임기가 남은 김성근 감독을 중도해임하고, '대구 맨' 우용득을 사령탑에 앉혔다. 우 감독은 1989년 잠시 MBC에서 코치를 한 것을 제외하고 원년부터 줄곧 삼성의 벤치를 지킨 토종이었다.

대구의 한 원로 야구인은 "우승 청부사로 영입했던 김성근 감독의 야구가 호쾌한 공격야구를 바라는 대구 팬들과는 맞지 않았다. 팬들은 김 감독의 잦은 투수교체를 비난했고, 홈런보다 번트에 치중한 야구 스타일에 실망했다. 그럼에도 우승을 하지 못했으니, 팬들의 원성은 높았다"며 당시 분위기를 설명했다.

삼성은 우 감독을 사령탑에 앉히며 여러 가지를 노렸다.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은 팀 컬러 쇄신과 흥행이었다. 그런 면에서 우 감독은 지역 팬의 마음을 달래는 데 적임자였다. 우 감독은 고교선배인 정동진 전 감독의 계보를 이어 1970년대 중반부터 국가대표 포수로 활약했던 대구지역 스타로 프로 창설 직전인 1981년에 현역을 은퇴해서 한일은행 코치로 있다가 프로 출범과 함께 삼성에 합류했다. 오랫동안 여러 명의 감독 곁을 지켰기에 지휘봉을 잡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우 감독이 사령탑에 오르자마자 한 일은 선수단 개혁이었다. 칼자루는 고참들에게 향했다. 김성근 감독이 불러 모은 타 구단 선수들, 즉 신경식, 최일언, 이광길, 조범현을 모두 일괄 정리했다. 원년부터 프로선수 생활을 했던 베테랑 김용철, 장태수, 허규옥은 물론 수년간 에이스 역할을 했던 김성길까지도 정리 명단에 올렸다.

평균 연령을 뚝 떨어뜨렸지만 후유증이 예상됐다. 구단도 개혁에 손을 들어줬다. 삼성은 당장 우승을 못하겠지만 몇 년 뒤를 바라봤다. 삼성은 우 감독에게 중상위권 성적만 유지할 것을 주문했다. 실제로 우 감독이 처음 지휘봉을 잡은 1993년, 삼성은 잘해야 4위권 전력으로 평가받았다. 당시 상황은 삼성이 2011년 류중일호를 출범시켰을 때와 매우 흡사하다. 류 감독이 초보감독이란 타이틀에 걸맞지 않게 3관왕에 오르며 최고의 한 해를 보냈듯, 당시 우 감독도 자신의 앞에 드리워진 암울한 기운을 걷어내고 팀을 2위에 올려놓는 파란을 연출했다. 비록 그해, 한국시리즈서 해태에 우승컵을 내줬지만 삼성의 개혁은 성공으로 흘렀다.

고참들의 빈자리는 그동안 부상과 부진에 허덕였던 선수들이 메웠다. 무엇보다 신인들의 활약이 눈에 띄었다.

마운드에서는 그동안 부상과 부진으로 힘을 보여주지 못했던 성준과 김상엽이 각각 5년, 3년 만에 10승대 투수반열에 복귀했고 2년차 김태한도 14승을 거뒀다. 신인 박충식은 데뷔 첫해 14승(7패 2세이브)을 거머쥐는 맹활약으로 에이스 역할을 했다.

최종문 야구해설가는 "그해 삼성의 타선은 불을 뿜었다. 김성래가 터널과도 같았던 부상에서 벗어나며 5년 만에 규정타석을 채우면서 홈런왕과 타점왕에 복귀했고, 대형 신인 양준혁도 데뷔 첫해 타격왕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시즌을 마쳤을 때 김성래는 MVP, 양준혁은 신인왕에 올랐다. 한 팀이 2개의 타이틀을 쥔 건 1985년 해태 김성한과 이순철 이후 역대 두 번째였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공격일변도로 제 모습을 찾은 삼성과 프랜차이즈들의 활약에 관중은 폭발적으로 늘었다. 1992년 겨우 30만 명을 넘긴 대구구장 관중 수는 1993년 53만9천102명이 찾아 전년 대비 71%의 가파른 상승곡선을 그렸다. 평균 관중 8천557명을 기록한 그해, 삼성은 사직구장을 제외한 지방구장 최초로 관중 50만 명 시대를 열며 흥행몰이를 시작했다.

최두성기자 dscho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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