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부] 중화(中華)의 추억

입력 2011-11-21 10:50:15

중국은 베트남전 동안 북베트남에 엄청난 지원을 해줬다. 프랑스 식민 세력을 몰아낸 디엔비펜푸 전투의 빛나는 승리도 소련과 함께 중국이 지원한 무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북베트남에 대한 중국의 지원은 1950년부터 1978년 종전 때까지 200억 달러에 달한다. 소련과 동유럽 국가의 원조 물자도 대부분 중국이 운송해 북베트남에 전달했는데 그 비용 또한 만만치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중국은 중국후근부대(中國後勤部隊)라는 이름으로 총 32만 명의 병력도 파견했다. 이들 병력은 최대 17만 명이 동시에 북베트남 전역에 주둔하면서 후방 지원 임무를 수행했다. 이 중에는 1만 5천 명의 방공포부대도 있었는데 2천여 회의 전투에 참가해 1천700대의 미군 전투기를 격추시키고 1천600대에 손상을 입히는 전과를 올렸다.('환호 속의 경종' 유용태)

그러나 양국은 베트남전이 끝나자마자 원수가 됐다. 캄보디아를 침공한 베트남을 응징하겠다며 중국이 베트남에 쳐들어간 것이다. 바로 중월(中越)전쟁(1979.2.17~3.16)이다. 이 전쟁은 중국의 패권주의와 2천 년간 중국에 시달려온 베트남의 중국에 대한 본능적 거부감이 충돌한 사건이다.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침공한 것은 메콩텔타와 호찌민시를 포함하는 베트남 핵심 지역을 둘러싼 영토 분쟁 때문이다. 이 지역은 19세기 초까지만 해도 캄보디아 영토였지만 프랑스는 이 지역을 캄보디아에서 빼앗아 베트남에 합병했다. 당시 크메르루주 정권은 중국을 등에 업고 이 지역을 되찾겠다고 공공연히 주장했다. 이는 베트남의 눈에는 크메르루주를 앞세운 중국의 베트남 지배 속셈으로 비쳤다. 중국은 20만 대군을 투입했으나 3만여 명의 사상자를 낸 채 치욕 속에 철군했다.

중국이 미국의 대(對)아시아 중시 정책에 대단히 불편해하고 있다. 남중국해 영토 분쟁을 벌이고 있는 아시아 국가에 대해서는 "미국의 개입에 현혹되지 말라"는 소리도 한다. 해당 국가의 반응은 묵묵부답이다. '너나 잘하세요'라는 뜻인 것 같다. 힘 좀 생겼다고 주변 국가를 윽박질러온 결과다. 왕조국가건 사회주의국가건 중국이 한순간도 포기하지 않은 것이 있다. '중화(中華) 패권주의'다. 한국전쟁에 세계가 정신이 팔려 있는 사이 티베트를 먹어치우고 남의 나라 역사를 제 것이라고 우기는 것이 중국이다. 그런 자세는 주변국의 반발만 살 뿐이다.

정경훈 논설위원 jghun316@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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