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 없이 살 사람도 세상에는 많지만 좋든 싫든 지금의 나는 법으로 먹고사는 사람임을 부정할 수 없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 전까지 나는 '법가'를 '법치'의 중국판 버전 정도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몇몇 관련 서적을 통해 깨닫게 된 중국 고대 '법가'의 실체는 이와는 판이한 것이었다. 그것은 '법에 의한 통치'가 아니라 '법을 이용한 통치'였으며, 이때의 법이란 '군주가 백성을 통치하고자 이용하는 형벌 도구'에 다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권력의 기술이니 통치술이니 제왕학이니 심지어는 최초의 전체주의라는 말들이 늘 법가 사상을 따라다니곤 한다.
한비자를 계기로 법가를 흥미롭게 읽어나가던 나는 청나라 말엽의 사상가 이종오의 저서이기도 한 '후흑학'(厚黑學)을 만나게 되었다. 이는 '두꺼운 얼굴'과 '시커먼 마음'의 처세술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종오는 '유방은 낯 두껍고 속 검은 사람이라 천하를 차지했고, 항우는 그렇지 못해 유방에 졌다'고 썼다. 그에 의하면, 중국 역사를 통틀어 대부분의 영웅호걸은 이처럼 낯 두껍고 속 검은 자들이었다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낯 두꺼운 인물의 대표주자는 '유비'로, 그는 덕망 높은 자신의 이미지 만들기에 갖은 술수를 다 썼다고 전해진다. 또 속 검기로는 '조조'를 따를 자가 없는데, 그는 사람을 최대한 이용하다가 상황이 바뀌면 가차없이 버린, 전형적인 '난세의 간웅'이었다는 것이다. 이렇듯 후흑이 군주의 처세술과 통치술로 맹위를 떨친 이상 군주를 둘러싼 소위 궁중사회 역시 권모술수와 무관할 수 없는 법이다. '한비자'에는 이와 관련된 몇몇 이야기가 전해진다.
초나라 재상에게 어느 날 신참내기 신하가 들어와 재상의 총애를 독차지하게 된다. 이에 위기를 느낀 고참은 재상에게는 아끼는 신참의 집에서 주연을 베풀라 권하고 신참에게는 재상이 무기를 좋아하니 현관에서 정문에 이르기까지 무기를 진열하라고 일러둔다. 이어 무기를 보고 놀란 재상에게 그는 매우 위험하니 어서 자리를 뜨라고 충언(?)한다. 물론 신참은 곧바로 재상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초나라 회왕은 위나라 왕으로부터 미인을 선물받고 그녀를 몹시 아꼈다. 이에 회왕의 부인은 왕보다 자신이 더 미인을 아끼는 듯한 제스처로 왕의 신임을 얻은 다음 그 미인에게는 왕이 유독 그녀의 코가 밉다고 하니 앞으로 왕을 뵐 때는 반드시 코를 가리라고 이른 후 왕에게는 그녀가 왕의 냄새를 맡기 싫어 코를 가리는 것이라고 전함으로써 왕에게서 '코를 베어 버려라'는 명령을 이끌어냈다.
이미 우리에게 너무나 많이 노출된 권모술수여서일까? 위 두 일화에서 우리는 고참 신하와 왕의 부인의 재기에 무릎을 치기보다는 재상과 왕의 어리석음에 먼저 한숨 쉬게 된다.
얼마 전 온 나라를 들끓게 한 선거가 있었다. 조금은 다른 정치인일 수 있으리라 온 국민이 기대했던 두 법조인 간의, 그래서 더 실망스러웠던 지루한 흑색 공방으로 선거는 끝났다. 후흑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선거였다. 후흑을 탓하기에 앞서 우리는 왜, 아직도, 이다지도 어리석은가라는 탄식이 먼저 나오는 선거였다.
똑같은 물을 먹고도 뱀은 독을 만들어 내지만, 소는 우유를 만들어 내는 것이니 '한비자'가 진정한 리더십을 위한 교본이 되기에 충분하다고 설파하는 이에 따르면 진정한 리더는 무한책임자로서 마지막까지 책임을 진다고 한다. 세종의 한글 창제 과정을 미스터리와 무술 활극으로 그려내고 있는 드라마가 있다. 세종은 자신이 아끼는 집현전 학사들이 연이어 살해당하자 자신의 일을 하다 그들이 죽었고 자신이 죽인 것이라 심하게 자책한다. 그의 책임이 아니라는 말에 그는 절규하듯 외친다. 조선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 꽃이 지고 홍수가 나고 벼락이 떨어져도 그의 책임이며, 그게 임금이라고…, 모든 책임을 지고 그 어떤 변명도 필요 없는 자리, 그게 바로 조선의 임금이라는 자리라고…. '나는 가수다'에 이어 '나는 꼼수다' 열풍이 전국을 강타하고 있지만 이 정도는 되어야 '나는 조선의 임금이다'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여기서 더 나아가 여기저기 '나는…'만을 앞뒤 없이 내세우기보다는 '너는…, 너는 말이지…'라고 서로에게 손 내밀 수 있다면 그저 온통 '민주'뿐 이 땅에 단 한 번도 실현된 적 없다는 '공화국'으로 우리도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김계희/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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