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울수록 더 선명해지는 유년의 고독과 슬픔
최병소의 작품은 '상처'투성이다. 아우성치며 모진 세월을 살아내야 하는 삶의 그것과 닮았다. 헤질 대로 헤져 듬성듬성 생채기가 난 채로, 시커멓게 타버린 가슴으로, 세월의 무게가 쌓여 있는 종유석같이 소리 없는 절규로 혼자 서 있다. 그래서 아프다.
'무제'라는 타이틀을 가진 8m에 이르는 이 작품은 대구에서 처음으로 선보이는 설치작이다. 자주 소개된 평면 작업보다 설치작품은 더 강하게 작가의 특성을 전달한다. 결이 찢어지고 돋아남을 선명하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단 한 점이 전시돼 전달력은 더욱 크다. 여기에 시시각각 갤러리를 통과하는 빛의 변화는 작품의 찢어진 흔적을 더 깊게 하거나 오히려 찬란하게 만든다. 화려함과 아픔의 공존이다.
최병소의 작업은 지우기로 시작한다. 신문지 위의 글자를 볼펜으로 지우고 또 연필로 지우기를 수없이 반복해 마침내 신문지는 얇은 금속성 물질로 변환한다. 그의 작품을 대할 때 종교적인 느낌을 받는 것도 이 변화의 과정이 있기까지 작가가 했어야만 했을 반복 작업이 오롯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섬처럼 자신을 가둔 채 얼마나 많은 지우기를 해야 신문지가 얇은 양철처럼 바뀔까. 거기에 생각이 머물면 엄숙해진다.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잊은 듯 몰입해 지우기를 반복하는 작가의 모습을 보노라면 그 자체로 외로운 섬이다.
지난해 이인성미술상을 수상하면서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 어색해한 것도 작가의 이러한 성격 때문일 것이다. 스스로 가두면서 하는 작업을 통해 그는 비사교적이며 낯가림이 심한 사람이 되었다. 원래 그런 사람이어서 이런 작품이 가능했을 수도 있겠다.
작가의 친구는 라디오와 신문이다. 지우기를 위한 반복 작업을 하다 힘들면 라디오를 듣고 영화를 본다. 최병소는 " 나의 작품은 슬픔이 아니라 아픔이다. 1950년대 유년기의 전쟁과 빈곤으로 길고 험하게 보낸 세월의 상처가 떠나질 않는다"고 고백한다. 아마도 그의 작업은 유년의 아픔을 지우려는 흔적이지만 그럴수록 아픔은 더 강하게 튀어나오는 듯하다.
상처는 상처로 위로받는 걸까. 그의 아픔이 덕지덕지 묻어 있는 작픔 앞에 서면 기이하게도 상처가 치유되는 느낌을 받는다. 어떤 이는 그의 작품 앞에서 길게 울고 어떤 이는 길게 호흡하고 어떤 이는 길게 생각을 풀어놓는다.
만추(晩秋)다. 한 작가의 고독한 작업과 유년의 아픔의 흔적들이 가져다주는 침묵과 절규로, 한 해의 힘듦을 위로받고 새로운 힘을 얻어갔으면 한다.
조덕순 <갤러리 아소대표>
·11월 30일까지 갤러리 아소, 018-217-4480, 관람료 5천원.
사진·성일권기자 sungi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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