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창] 나쁜 소식 전하기

입력 2011-11-14 07:56:08

외래를 보다 보면 환자보다 쪽지가 먼저 들어오는 경우가 있다. 대개는 자식들이 요청한 것이고 환자인 부모님께 병명을 알리지 말아 달라는 내용이다. 자주 있는 일이라서 익숙하기도 하지만 사실 내게는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다. 암환자만 보는 나로서는 오히려 '암'이라는 말을 웬만해서는 쉽게 입에 올리지 않는 것이 오래전부터 몸에 밴 습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경우에 보통 '위가 헐어서 수술하셔야겠다'는 정도로 이야기하는데 신기하게도 '위가 헐었다고 왜 수술하느냐?'고 되묻는 분은 거의 없다. 그렇게 종종 진료실에서는 속이는 자식들과 속는 척하는 부모, 그리고 그 사이에서 황당한 이유를 들어 수술을 권하는 의사가 함께 만들어내는, 흡사 연극과도 같은 진풍경이 연출된다.

우리네 정서가 과거부터 '나쁜 소식'은 의사가 환자보다는 가족들에게 먼저 알리고, 가족들이 환자에게 전하도록 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혹시라도 환자에게 바로 전달되면 가족들이 병원에 거세게 항의하기도 했다. 이웃나라인 중국과 일본도 사정은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한다. 그런데 최근 국내의 한 연구팀이 성인 남녀 1천 명을 대상으로 한 '암 발생 소식에 대한 한국인의 의식 조사'의 결과가 눈길을 끈다. 의사가 암 환자에게 병세를 직접 설명하는 것이 가장 무난하다는 것이다.

조사 결과를 보면, 암환자든 일반인이든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우리나라 사람 10명 중 9명은 암 진단 초기 단계부터 의사한테 직접 암 발생 사실을 전달받기를 원했다. 가족을 통해 간접적으로 듣길 원하는 경우는 10명 중 1명에 불과했다. 의사가 암 발생을 전할 때도 대다수(92%)가 둘러서 말하기보다는 바로 '암'이라고 솔직히 말해주길 원했다. 병세가 말기암이고 치료 효과를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더라도 이 사실을 가족을 통해 듣기(14%)보다는 대부분(84%) 처음부터 의사가 자세히 설명해주길 바랐다.

따지고 보면 굳이 이런 통계가 아니더라도 진료는 의사와 환자 간의 계약이므로, 의사는 환자 본인에게 검사의 결과를 정확히 알려야 할 법률적 의무도 있다. 그렇게 '나쁜 소식'을 전하는 것은 아무리 힘들어도 어차피 의사의 몫이고, 더구나 매우 중요한 역할이기도 하다. 그래서 몇 해 전부터 의과대학 강의와 의사국가고시 실기시험 항목에 '나쁜 소식 전하기'가 있다. '나쁜 소식'을 전하는 요령은 그에 대한 책과 논문들뿐 아니라 워크숍도 자주 열릴 만큼 간단하지가 않다.

그중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조금만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전문용어를 쓰지 말고, 지나친 동정도 피하며, 사실을 축소하거나 숨겨서도 안 된다. 퉁명스럽지 않게, 과도한 표현을 삼가며, 경과를 예언하듯 해서도 안 된다.' 한 귀퉁이만 엿보아도 이렇듯 '나쁜 소식'을 잘 전하기는 힘들고 까다롭지만, 그래서 더욱 소중한 의료인의 책무인지도 모른다.

정호영 경북대병원 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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