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지역 한나라당 소속 한 국회의원실의 A 보좌관은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린다.
지난 2009년 7월 여야가 미디어법 처리를 두고 격렬하게 다툼을 벌일 때였다. 전날에 이어 본회의장 돌파 임무를 수행하던 중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고향에 계신 일흔 살의 어머니였다.
"테레비 보다가 국회가 너무 난잡해서 전화했데이. 쓸데없이 멱살 잡고 목청 높이는 싸움에 끼지 말고 몸 간수 잘 하거라. 요즘 같아서는 아들 자식이 국회에서 일한다는 얘기를 못하겠더라."
가슴 뜨끔한 순간이었다. 더욱이 전날 저녁 열 살 먹은 아들에게 '지방출장 중이라 외식은 다음에 하자'고 거짓말까지 한 뒤여서 뒷맛은 더욱 씁쓸했다.
2011년 11월.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이 다시 술렁이고 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안 처리를 둘러싸고 전운이 드리우고 있기 때문이다.
막판 협상에서의 극적 타결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보좌진들은 물리적 충돌에 대비한 '차출' 및 '출동'에 대비하고 있다.
여야를 막론 모든 보좌진들은 국회 내 물리적 충돌과정에서 당직자와 자신들이 동원되는 상황에 대해 강한 불쾌감을 표시하고 있다.
한나라당 의원실의 한 비서관은 "국회의원 보좌진이 갖춰야 할 역량 가운데 '물리력 행사를 위한 강한 체력'이 포함돼서야 어떻게 대한민국이 세계무대에서 G20 의장국에 걸맞은 위상을 가질 수 있겠느냐"며 "국회가 나름의 역할과 기능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민들로부터 지탄을 받는 이유를 국회의원들이 깨달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미 '유사시 출동'을 결의한 민주당 보좌진들도 불만이 있기는 마찬가지다. 민주당 의원실의 B보좌관은 "개인적으로 한'미 FTA를 반대하는 민주당 보좌진들이라 할지라도 국회 내에서 몸싸움을 하는 방식까지 동의하지는 않는다"며 "국회의원들이 정치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더욱 잘 보좌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각 당 당직자들과 국회 보좌진들은 일단 여야 지도부가 물리력 행사 방침을 정하면 구조적으로 '징병'을 거부할 수 없다.
당직자들은 각 정당으로부터 급여를 받는 직장인이다. 따라서 당 지도부가 정한 지침을 철저하게 이행해야 인사'임금 등에서 불이익을 받지 않는다. 실제로 그동안 여야 간 물리적 충돌이 벌어질 때마다 각 당의 당직자들은 전원 '출동'해 정예병의 면모를 과시해 왔다.
민주당 당직자는 "몸싸움이 시작되면 당직자는 '전원', 의원실에선 당 지도부에서 요청한 인원이 충돌현장으로 모인다"며 "말하자면 당직자는 상비군, 보좌진은 예비군 역할을 맡는다"고 말했다.
국회의원 보좌진은 자신들이 보좌하고 있는 의원의 의중에 따라 움직인다. 국회의원이 보좌진 임면 권한을 완벽하게 행사하기 때문이다. 당직자와 달리 어떤 보호 장치나 임기 보장도 없다. 국회의원이 "집에 가라"고 하면 그날부터 실업자다.
당 지도부의 '차출' 요청에도 불구, 보좌진을 물리력 행사에 동원하지 않는 의원이 있는 반면 의원실 전력을 총동원, 파행현장의 선두에 서는 의원들도 있다.
한나라당 의원실의 한 보좌관은 "한'미 FTA 비준안 갈등의 경우 내년도 총선 공천 시점을 얼마 남겨두지 않고 벌어지고 있어 의원들이 당 지도부의 눈치를 더욱 볼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여야 간 물리적 충돌 조짐이 보이자 한나라당과 민주당 보좌진협의회에서는 이에 대한 대비책 논의에 돌입했다.
한나라당 보좌진협의회는 가급적 보좌진들 간 물리적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 당 지도부가 국회 질서유지권을 적절히 활용해 줄 것을 요청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안일근 한나라당 보좌진협의회장은 "당 지도부가 큰 싸움으로 번지지 않게 하려는 의지만 있다면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며 "의원들만 참여하는 논의공간을 만들기 위해 각종 출입통제 조치를 서둘러 내리는 방법이 있다"고 말했다.
반면 민주당 보좌진협의회는 한'미 FTA 비준안이 내용적으로 문제가 있기 때문에 육탄저지도 불사하겠다는 입장이다.
장성훈 민주당 보좌진협의회장 "복도를 사이에 두고 오순도순 지내던 여야 보좌진들이 몸으로 부딪히는 최악의 상황은 피하는 것이 최선이지만 내용적으로 문제가 있는 한'미 FTA 비준안 처리를 그냥 지켜볼 수만은 없다"며 "현재 여야가 논의하고 있는 국회의장 직권상정 요건 강화, 합법적 의사진행 방해 도입 등 국회선진화방안이 조속히 제도화된다면 국민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파행은 줄어들 것"이라고 말했다.
정치 전문가들은 보좌진들과 당직자들이 국회 파행사태에 동원되는 악순환을 끊기 위해서는 국회의원 스스로가 국민의 대표로서 자부심과 명예를 가지고 의정활동을 펼치겠다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국민을 대표하는 헌법기관으로서 어떠한 외부의 힘에도 의존하지 않고 대화와 타협으로 국정을 풀어가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필요하다는 제안이다.
한편 지난달 민주당 국회의원실에서 자유선진당 국회의원 사무실로 자리를 옮긴 C비서관은 요즘 선후배 보좌진들로부터 부러움을 사고 있다. 혹시 있을지 모를 여야 보좌진 간 충돌을 피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C비서관은 "재적 국회의원 수 차이가 현격한 상황에서 소수정당이 저지해야 할 안건이 있거나, 국회가 파행으로 치닫는 모습이 필요한 정당이 있는 한 어떠한 제도적 보완에도 불구하고 보좌진 간 물리적 충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유광준기자 june@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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