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마음의 책] 전투든 일상이든 '도망'은 중요한 덕목이다

입력 2011-11-05 08:00:00

삼십육계/국학서원계열 편집위원회 지음/유소영 옮김/시그마 북스 펴냄

삼십육계(三十六計)는 중국의 군사사상과 전투경험을 집대성한 병서다. 36가지 병법 혹은 전술을 담고 있으며, 마지막 계가 '도망하는 것이 상책'이라는 주위상(走爲上)이다.

전투에서 적의 전력이 아군보다 확실히 우세할 때 취할 수 있는 전술은 투항, 강화, 도주 등 세 가지다. 투항은 완전한 패배를, 강화는 절반의 패배를 의미하지만 도주는 권토중래의 기회를 남겨놓는다는 점에서 패배와 다르다. 흔히 도망이라고 하면 비겁하다고 생각하기 십상이지만, 도망은 아무나 갈 수 있는 게 아니다. 큰 피해를 당하기 전에 도망치려면 '아군이 절대 불리하다'는 형세를 정확하게 읽을 줄 알아야 하고 자존심을 굽힐 줄 알아야 한다. 도망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후일을 도모하기 위함이므로 아군이 피해를 입지 않고 달아날 수 있는 지략이 있어야 한다.

한나라 고조 유방은 항우에게 많이 패했지만, 끊임없이 도망 다닌 덕분에 최후의 승자가 되었다. 그는 항우의 군대를 피해 도망갈 때 너무나 다급한 나머지 마차의 무게를 줄이기 위해 자신의 아들과 딸을 발로 차 마차 밖으로 내다버리기도 했다. 그는 도망치는 데 최선을 다했고,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았지만 어디까지나 그의 도망은 후일을 도모하기 위함이었다. 삼국지의 유비와 현대 중국의 마오쩌둥도 마찬가지였다. 유비는 조조에게 항복하고, 원소에게 항복하고, 유표에게도 엎드렸고, 손권에게도 머리를 조아렸다. 살아남기 위해 그는 무엇이든 했다. 마오쩌둥 역시 '대장정'으로 알려진 '피란살이'를 통해 자신들의 이념과 가치를 설파해 후일을 도모했다.

이에 반해 유방과 맞섰던 항우는 많이 승리했지만 '단 한번의 패배'를 참지 못했다. 도망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는 "하늘이 나를 망하게 했는데, 내가 강을 건너 무엇을 하겠는가. 나 항우는 강동의 자제 8천여 명과 더불어 장강을 건너 그 뜻을 펼쳤으나, 이제 한 사람도 돌아오지 못하게 되었다. 설령 강동 지역의 부형들이 나를 가련히 여겨 왕으로 맞아준다 한들 내가 무슨 면목으로 그들을 보겠는가? 설사 저들이 나를 책망하지 않는다 한들 부끄럽지 않겠는가?"라는 말을 남기고 스스로 목을 베고 죽었다. '와신상담'이라는 고사로 잘 알려져 있는 월나라 구천 역시 수십 년을 물러나 있으며 기회를 노렸고, 끝내 오나라 부차를 무찔렀다. '도망치는 게 상수'라고 쉽게 말을 하지만, 진정 물러나야 할 때를 알고, 지혜롭게, 아군을 다치지 않게 하고 물러나는 일은 굉장히 어렵다. 어쩌면 전투에서 적을 몰아붙여 승리를 거두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일 수 있다. 전투에서든 일상에서든 '도망'은 중요한 덕목이다.

근래 우리나라의 정치와 사회를 들여다보면 '물러남으로써 승리를 도모하는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 매일매일이 전면전이고, 백병전이다. 그렇게 지루하게 싸워대느라 목표도 없고 전략도 없어 보인다. 물러나서 전열을 가다듬고, 무엇을 위해, 어떻게 싸울 것인가를 고민하는 모습이 없다. 물어뜯고 싸우는 꼴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다만 싸움 그 자체를 위한 싸움처럼 보인다. 그야말로 '개싸움'이다.

역사 속에서 승리를 쟁취했던 군웅들은 개싸움을 벌이는 대신 도망칠 줄 알았다. 그들이 죽기를 각오하고 전면전을 펼치는 대신 도망을 선택했던 것은 혼란한 세상을 끝내고 나라를 세우거나, 더 나은 세상을 만들겠다는 분명한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내일의 비전이 없는 자들은 물러나서 후일을 도모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법이다. '개싸움'만이 존재 이유인 자들이 너무 많다. '개싸움'을 국익으로 포장하는 자들의 낯짝에 침을 뱉어주고 싶다.

조두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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