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입는다. 고로 존재한다?" 소비로써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 보이는 현대인들. 그중에서도 가장 직접적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소비행위는 바로 '스타일'과 관련된 것들이다. 패션이라는 것은 타인에게 나를 드러내는 가장 직접적인 경로인 만큼 사람들은 자신을 치장하는 데 꽤나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하며 살아간다.
치장을 하는 데 있어 공식은 단 하나다. '아름답게'(!) 보이는 것. 하지만 이 아름답다는 것이 상당히 난해한 대목이다. 사람들마다 보는 눈이 제각각인데다 남자와 여자가 전혀 다른 눈으로 '패션'을 해석한다. 주로 여성은 남성에게, 남성은 여성에게 멋지게 보이고 싶은 것이 가장 기본적인 욕구이겠지만 워낙에 복잡다단한 미에 대한 방정식이 존재하다 보니 풀기가 쉽지 않다.
◆섹시&매니시한 매력, 괜찮지 않나요?
올가을 여성들에게 최고의 유행은 밀리터리룩과 호피무늬일 것이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에는 더욱 야생적인 이미지가 강해지면서 한결 도드라진 패션이 인기를 얻고 있다. 사실 굳이 트렌드를 따지지 않더라도 여성들에게 호피무늬는 일종의 로망과도 같다. 여성스러움과 야생미를 동시에 살려 섹스어필할 수 있는 아이템으로 손꼽히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레깅스까지 곁들이면 환상이다. 찬바람에도 춥지 않게 다리를 감싸주면서 라인을 드러낼 수 있는 레깅스는 여성들이 열광하는 패션 아이템 중 하나다. 호피 마니아인 김인영(29) 씨는 "가을에 어울리는 갈색톤에다 지루함을 없애주는 포인트를 곁들인 호피무늬야말로 가장 섹시해 보이는 문양인 것 같다"고 열광했다. 그녀는 가방부터 구두, 머플러, 원피스, 머리핀, 속옷에 자동차 시트 커버까지 호피를 사용할 정도다.
레깅스는 여성이라면 누구나 몇 개쯤 가지고 있는 아이템이다. 임은주(28) 씨는 "시퐁 원피스나 짧은 숏팬츠를 입고 싶긴 하지만 노출이 부담스러울 때 레깅스를 받쳐 입으면 부담이 덜어져 좋다"고 했다.
올해 또 다른 유행 트렌드인 밀리터리룩과 워커부츠, 매니시룩('남성풍, 남자와 같은 여성'이라는 뜻으로 남성복 디자인을 여성복에 적용한 스타일)은 꾸미지 않은 편안한 매력에다 강인한 인상을 동시에 풍길 수 있는 아이템. 이 때문에 해마다 가을'겨울 시즌이면 크게 유행을 타지 않는 스타일로 손꼽힌다.
하지만 남자들의 눈에는 영 못마땅해 보이는 스타일이 바로 위에 언급한 것들이다. 남자들은 레깅스를 두고 "벗은 것도 아니고 입은 것도 아닌, 마치 내복처럼 보이는 우스꽝스러운 스타일"이라고 혀를 내두른다.
그나마 호피무늬에 대해서는 '매력적으로 보인다'는 일부 의견도 있지만, 밀리터리룩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거부 입장을 밝히는 이들이 상당수다. 강인구(33) 씨는 "군대 다녀온 남성이라면 일단 '국방색'이라고 불리는 카키색과 워커에 대한 거부감부터 들게 마련"이라며 "여성스러운 매력이 보이지 않아 사실 예쁘지 않다"고 했다.
◆남성미 물씬? 글쎄요…
남성들이 최고의 멋쟁이 스타일로 꼽는 것 중 하나는 잘 기른 구레나룻과 턱수염이다. 한 헤어디자이너는 "적당한 사이즈의 구레나룻이 없으면 턱 공간이 비어 보여 굉장히 여성스럽게 보이는 경향이 생긴다. 구레나룻이 각이 질수록 남자답고 얇아질수록 여성스러워지는 이미지가 있다 보니 구레나룻은 남성성을 표현할 수 있는 하나의 액세서리 개념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했다. 파마머리 역시 나름대로 스타일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남성들이 변화를 시도하는 스타일로 손꼽힌다.
요즘 유행하는 스키니진은 남성들에게 역시 인기 아이템. 조금 몸매 괜찮고 스타일에 관심 있다 싶은 남성들은 스키니진 한두 벌쯤은 가지고 있을 정도다. 박주환(21) 씨는 "연예인들이 자주 입다 보니 자연스럽게 따라하게 되는데다, 의류 매장에서도 적극 추천하는 아이템"이라며 "몸매를 잘 살려주는 디자인이기 때문에 조금 활동에 불편함은 있지만 기꺼이 감수하고 즐겨 입는다"고 했다. 여기에다 올해 유행한다는 끝이 날렵하게 뾰족 튀어나온 구두를 매치하면 멋쟁이 패션이 완성되는 것이다.
하지만 여성들의 눈에는 이런 스키니진을 입은 남성들이 자칫 '꼴불견'으로 비치기 십상이다. 꽉 끼는 바지를 입은 모양새가 영 예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여성 대다수의 견해였다. 황수희(26) 씨는 "그건 연예인들이나 하니 멋있는 모습이지 평범한 남성들이 따라한다고 영 스타일이 살지 않는다"며 "솔직히 너무 날라리 같은 이미지를 풍기기도 하고, 뾰족구두까지 신으면 마치 미끈한 갈치같이 뺀질거리는 이미지마저 떠오른다"고 투덜거렸다.
또 여성들이 싫어하는 남성상에는 불끈불끈 근육질을 과시하는 남성, 셔츠 단추를 서너 개 풀어헤친 모습, 한때 유행했던 금목걸이, 지저분해 보이는 콧수염, 양배추처럼 보이는 파마머리 등이 꼽혔다.
◆이성이 싫어하는 것은 안다. 하지만?
사실 진화론적 관점에서 보면 남녀의 이런 '치장'은 서로 이성의 관심을 집중시키는 방식으로 발전하는 것이 기본 원칙이다. 짝을 짓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인간의 특성상 이성의 관심을 갈구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욕망이기 때문. 그런데도 우리는 왜 이성이 싫어한다는 사실을 뻔히(?) 알고 있는 스타일을 '패션'이라는 미명 아래 행하고 있는 것일까?
일부 여성들은 남성적인 의상을 선호하는 이유에 대해 "좀 더 강해 보이고 싶은 욕망"이라고 해석했다. 여성들이 자신을 꾸미는 이유에는 이성의 눈길을 사로잡기 위함도 있지만 자기만족을 위한 요소도 상당하다는 것. 그중 하나가 '날 만만하게 보지마. 난 강인한 여자야'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라는 것.
군대 전문잡지인 앤섬의 편집인인 마크 하우버는 밀리터리룩의 인기 비결에 대해 "군복무늬의 옷을 입으면 더 크고, 힘세고 터프해 보인다"며 계속되는 경기침체로 초라해진 모습을 밀리터리룩으로 감춰보려는 심리가 군복 패션 열풍을 몰고 온 것으로 풀이했다.
자신은 미처 인식하지 못하지만 호르몬의 차이에 따라 소비 성향이 달라진다는 흥미로운 분석도 있다. 경북대 심리학과 김지호 교수는 "손가락 검지와 약지의 길이에 따라 호르몬 분비에 차이가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며 "이를 바탕으로 학생들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해봤는데 아주 흥미로운 결과가 나왔다"고 소개했다. 약지가 길수록 남성호르몬이 많다고 한다. 실험 결과 남성 호르몬이 많아 약지가 긴 여성일수록 옷을 구매하는 데 관심을 덜 가지고 편안하고 남성적인 의상을 선호하는 경향을 보였으며, 검지가 긴 남성일수록 치장을 하는 데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소비를 하는 것으로 분석됐다는 것이다.
강준호 디자이너는 재미있는 해석을 제시했다. 남성이 여성들이 싫어하는 줄 알면서도 과도한 남성성을 강조하거나 튀는 스타일링을 하는 것, 여성 역시 남성이 싫어하는 줄 알면서도 남성적 매력을 풍기는 패션이나 여성들 사이에 유행하는 아이템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은 이성 간의 메시지이기보다는 동성을 향한 메시지로 볼 수도 있다는 견해다. 강 디자이너는 "동성 간에만 통용되는 코드를 통해 '내가 너보다 좀 더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아?'를 과시하는 수법의 일환으로도 해석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사회적인 틀에 갖혀버린 '유행'
'아름답다'라는 것은 절대적인 가치이기보다는 사회화된 개념인 경우가 많다. 아프리카의 어느 부족에서는 귀를 쭉 늘어뜨리거나, 목을 길게 늘여 뺀 것이 미의 기준이 되기도 하는 것을 보면 그 사회 속에서 통용되는 개념인 경우도 상당수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보여지는 남성, 여성들의 패션은 '유행'이라는 틀에 갇혀 있는 경우가 대다수다. 어정쩡한 모양새 때문에 일명 '똥싼바지'라는 별명이 붙은 배기팬츠도, 흔히 '월남치마'라고 불리는 롱 스커트도 '유행'이라고 하면 너도나도 이를 입고 거리를 활보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아름답다'는 개념 역시도 '남들이 괜찮다고 하는 것'에만 국한되게 마련이다. 제각각의 시선을 가진 4천800만 인구가 살아가지만 사실 패션에 있어서는 너도나도 비슷한 틀을 벗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의류브랜드 ENC 마케팅팀 장정미 대리는 "우리나라에서는 '따라하기' 심리가 너무 강하다 보니, 자신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도 자신만의 개성을 찾기보다는 남들이 하는 것을 좇으려는 경향이 강하다"고 밝혔다. 이는 특히 스타 마케팅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해외나 국내 유명 연예인들이 입은 의상은 곧장 매출 급상승으로 연결되며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간다는 것. 장 대리는 "변화는 주고 싶지만 용기가 나지 않을 때 교과서로 삼는 것이 바로 연예인들의 패션이 된 것 같다"며 "그렇다 보니 의류를 디자인하고 생산하는 입장에서도 이런 트렌드를 고려해 옷을 만들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런 '트렌드'의 틀에 갇힌 '미의 기준'에 대해 김지호 교수는 "유행이라는 것은 정보의 역할과 규범의 역할을 동시에 하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아름다움'이라는 복잡한 요소를 해석하는 데 있어 타인의 상당수가 예쁘게 느낀다고 하는 '정보'를 제공해주는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흐름에서 빗나가지 않는다는 일종의 모범 답안을 제시하는 복합적 역할을 해 주기 때문에 쉽사리 유행을 좇게 된다는 해석이다.
한윤조기자 cgdream@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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