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잉어는 뜯어 먹힐 때 가치를 인정받는다"…갈라파고스

입력 2011-10-22 08:00:00

◆갈라파고스/권운지 지음/만인사 펴냄

권운지 시인은 몸이 그 자체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기능성으로 평가받는 우울한 시대에 관해 이야기한다. 고로쇠나무는 늑골에 비닐 호스가 박힌 채 수액을 흘릴 때, 오래된 강물에서 자란 잉어는 뜯어 먹힐 때, 냉동되어 먼 바다를 건너온 소는 구워 먹힐 때 존재를 인정받는다. 몸은 더 이상 아름답지 않으며, 살아서 즐거운 대신 죽어서 그 가치를 인정받는다. 옛날부터 사람들은 '죽어서 비단보자기에 싸이느니 살아서 진흙밭에서 꼬리를 끄는 거북이가 되고 싶다'고 했는데, 그 인간적인 진리는 퇴색해버렸다.

시인 권운지는 인간의 탐욕을 비판적으로 바라보지만 새된 목소리를 내지는 않는다. 그는 다만 '그게 그렇다, 휴-'하고 낮게 한숨 쉴 뿐이다. 이를 두고 문학 평론가 변학수 교수는 "권운지의 시는 말로 포장하지 않고, 값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는 상처를 보여 주지만 울지 않고, 분노하지만 소리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인간의 탐욕을 안타깝게 바라보지만 표나게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타격은 더 깊다.

시집의 표제작이기도 한 '갈라파고스'와 '박스들'은 시인이 변해가는 세상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며, 어떤 목소리로 증언하는지 적확하게 보여준다.

'적도 아래 갈라파고스 제도가 있다. (중략) 바다 한 가운데 저마다 고립되어/ 섬마다 방울새나 거북이가 진귀한 진화론을 쓰고 있다. (중략) 멀지 않은 곳에 갈라파고스가 있다/ 춘란이 꽃을 피우지 못하는 사무실/ 책상 아래 무수히 뒤엉킨 전선들/ 수백만 볼트에도 감전되지 않는/ 잠을 잊은 야행성으로/ 생존을 위한 이 혹독한 진화(하략)' -갈라파고스- 중에서.

'골목 가장 자리를 조심스럽게 차지한/ 이제는 아무 것도 담을 수 없는 젖은 박스들/ 무엇인들 담지 않았으랴/ 한때 그 속을 꽉 채웠던/ 누군가를 위해 준비한 시간들이 빠져나간/ 저 헐거운 몸들' -박스들- 중에서. 90쪽, 8천원.

조두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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