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도 비행기가 어떻게 땅에서 뜨는지, 어떻게 하늘을 나는지 잘 이해하지 못한다. 앞날개에 제트엔진이 달려 있어서 마치 고무풍선에 가득 채워진 바람이 일시에 빠질 때 풍선이 일정한 방향으로 날아가는 것처럼 비행기도 그렇게 이륙하고 비행한다는 정도를 알고 있을 뿐이다. 아마 중학교 때였던가, 비행기 동체는 무게를 가볍게 하기 위하여 듀랄루민이라는 가볍고 단단한 합금으로 만든다고 배웠는데, 3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다. 설사 그렇다 해도, 아무리 날개에 성능 좋은 제트엔진을 달고 듀랄루민으로 가벼워진 몸이라는 것을 안다 해도, 막상 활주로에 몸을 누인 그 큰 덩치를 보면, 탑승구 앞에서 기다리는 그 많은 사람들과 이미 실었을 그 무거운 짐들을 생각하면, 비행기가 땅을 박차고 하늘을 난다는 사실은 여전히 불가사의처럼 느껴진다. 그 큰 덩치의 이륙과 비행은 나에게 다만 기적으로 다가올 뿐이다.
무거워진 몸을 느낄 때, 시시각각으로 내리누르는 시간의 무게를 느낄 때, 나는 활주로 위에 맥없이 누운 비행기를 생각한다. 도무지 뜰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그 큰 덩치가 땅을 박차고 하늘을 나는 것처럼, 도무지 뜰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것이 나의 현존이지만, 그래도 언젠가 문득 이 무거운 중력을 떨치고 이륙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생각해 보면, 비행기는 그냥 뜨지 않는다. 도무지 그 큰 덩치를 지탱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작은 바퀴 세 개로 노심초사 활주로까지 기어가서, 온몸을 떨며 땅을 박차고 날아오른다. 비행기라고 왜 두렵지 않겠는가? 그러나 땅을 버리지 않는 한 하늘을 얻을 수 없다. 누구든 무엇이든, 일정한 방향과 목표를 지니는 한 온몸을 떨며 휘청거리지 않을 수 없다. 노력하는 한 방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궤도를 상실하지 않은 휘청거림, 그 서투른 몸부림의 궤적은 아름답다. 살아있다는 말은 괴지 않고 흐른다는 말이며, 흐름은 한쪽으로 기우뚱할 때 일어난다. 기우뚱한 균형은 위험하지만, 살아있는 흐름을 원한다면 기우뚱하지 않을 수 없다. 만일 삶이 기우뚱하지 않다면, 그래서 위험하지 않다면, 죽음이 오기 전에 이미 죽어 있는지도 모른다.
식물이든 사람이든 심지어 광물이든, 무릇 살아 있는 존재는 위험을 자양분으로 자란다. 시루에 담긴 콩나물에 물을 너무 자주 주면 금방 썩어버린다. 위험하지 않기 때문이다. 언제 다시 물이 지나갈지 모르고 다음 순간이 보장되어 있지 않을 때, 시루에 담긴 콩나물은 오히려 건강하게 자란다. 순간에 충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을 너무 자주 준다거나 아예 물에 담가두면 콩나물은 금방 썩어버린다. 내일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금 아니라도 다음이 있고 오늘 아니라도 내일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썩는다. 내일이 보장되어 있기 때문에 현재의 순간이 느슨해진다. 누구든 무엇이든 현재의 순간이 느슨해지면 썩기 마련이다.
고대 인도의 수행자들이 끊임없이 유행(遊行)했던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심지어 자이나교에서는 한 곳에서 이틀 이상 머리를 눕히는 것을 금했다. 어디엔가 머문다는 것은 다만 다시 떠나기 위한 멈춤일 뿐이다. 걸식이 식사의 기본원칙이었던 것도 마찬가지다. 먹는 것, 자는 것, 입는 것에서 내일을 보장할 수 없는 위험한 삶일지라도, 스스로가 위험한 상황을 연출하며 사는 것이 수행자의 삶이었다. 유행과 걸식은 썩지 않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역설적이게도 누구든 무엇이든 괜찮은 놈이 잘 썩는다. 음식은 잘 썩어야 괜찮은 음식이다. 만일 빵을 샀는데 일주일이 지나도 곰팡이가 피지 않는다면, 그 빵은 먹을 수 없는 빵이다. 식물도 괜찮은 놈이 잘 썩는다. 난(蘭)이 그렇고 콩나물이 그렇다. 사람도 이와 다르지 않다. 괜찮은 사람이 잘 썩는다. 세간에 닳고 닳은 사람은 잘 썩지도 않는다. 마음바탕이 괜찮고 민감한 에너지를 가진 사람들이 잘 썩는다. 고래로 성직자, 수행자에게 엄격한 계율이 요구되었던 것도 이런 이유이다.
잘 썩는다는 것은 쉽게 전환이 일어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위험하다. 위험하다는 것은 초인이냐 폐인이냐의 기로에 서 있다는 말이다. 폐인이 될 가능성이 높을수록 초인이 될 가능성도 높다. 목을 꺾고 죽을 수도 있는가 하면 또한 찰나에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도 있는 순간이 바로 위험한 순간이다. 위험하다는 것은 피하라는 말이 아니다. 다만 조심하라는 말일 뿐이다. 위험하다고 피하기만 한다면 삶은 무의미하다. 위험하지 않다면, 가슴 떨리는 삶도 없다. 그러므로 위험을 용서하라.
이거룡(선문대교수·요가학교리아슈람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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