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도가니

입력 2011-09-22 10:58:42

안개 낀 도시, 장애인 학교…거대한 폭력의 그림자

안개 낀 무진(霧津)시. 아내와 사별한 강인호(공유)는 모교 교수의 추천으로 무진시에 있는 청각장애인학교에 미술교사로 부임한다. '자애학원'으로 가는 이날도 짙은 안개가 그의 앞을 가로막고 있다.

안개를 뚫을 수 있는 것은 소리뿐, 그러나 학교의 아이들은 이 소리를 듣지 못한다. 한 청각장애아가 기차에 치여 죽는다. 그가 도착한 첫날이다. 그러나 교장과 교사들은 이를 쉬쉬한다. 무진경찰서 형사도 마찬가지다. 학교 재단이사장의 쌍둥이 아들인 교장과 행정실장은 그에게 학교발전기금 명목으로 5천만원을 요구한다. 자신이 생각했던 자애로움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직감한다.

그리고 우연히 듣게 된 여자 화장실의 비명 소리로 점차 거대한 폭력의 실체를 알게 된다. 인호는 담임을 맡은 반 아이들의 얼굴과 몸에 난 상처를 발견하고, 그렇게 만든 장본인이 교장과 행정실장, 생활지도교사라는 것을 알게 된다. 말을 할 수 없는 아이들에게 구타와 끔찍한 성폭행이 가해지는 학교. 인호는 무진인권운동센터 유진(정유미)과 함께 사건의 실체를 세상에 알리려고 한다.

영화 '도가니'는 약자인 청각장애아들을 통해 우리 사회의 부조리와 불의를 고발하는 영화다. 안개가 음습하게 내리는 도시에서 펼쳐지는 사악한 우리 사회의 어두운 자화상을 고통스러우면서 가슴 먹먹하게 그려내고 있다.

'도가니'는 공지영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광주의 한 청각장애학교에서 발생한 실제 성폭행 사건을 바탕으로 쓰인 소설은 인터넷에서 총 1천600만 건의 조회수를 기록하면서 상당한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다.

영화는 원작의 굵은 틀을 유지하면서 일부 캐릭터를 드러내거나, 수정을 가해 영화적 집중도를 높였다. 피해자인 아이들과 인호, 유진으로 인물구성을 압축하고, 대신 가해자들을 보호하려는 사악한 사회적 네트워크의 덩치를 더욱 정교하게 직조(織造)했다. 종교단체의 그릇된 집단주의와 전관예우라는 법조계의 부조리, 학교와 결탁한 비리 경찰과 이를 수수방관하는 교육청 등 더욱 거대해진 '악의 축'을 통해 진실을 향한 약자의 싸움을 더욱 드라마틱하게 그려냈다.

또 사건의 처참함을 영화답게 시각적으로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불 꺼진 교실과 복도, 세탁실, 안개 낀 철로와 욕실, 화장실 등 어둠 속에서 몸부림치는 아이들의 비극을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게 만들었다. 특히 영화 초반부터 속도감 넘치게 그려내 실화이거나 원작이 있는 경우 곧잘 범하는 우를 영리하게 비켜가면서 원작을 능가하는 완성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도가니'는 소설의 진정성과 영화의 선정성을 잘 조율하고 있다. 후반부 법정에서의 진실 공방과, 원작과 달리 변화를 준 결말은 관객의 몰입감을 높이는 영화적 배려다.

구타와 성폭행이 난무하는 범죄현장보다 더욱 끔찍한 것이 약자를 희생양으로 삼으려는 우리 사회의 부도덕성이다. 정의는 사리사욕에 깨어지고, 진실은 미친 사람들의 이기심에 묻히고, 선량한 사람들의 믿음은 강자들의 힘의 논리에 짓밟혀 버린다.

'도가니'는 '마이 파더'로 성공적인 장편 데뷔를 치렀던 황동혁 감독의 두 번째 작품이다. 해외입양 문제를 다룬 전작에 이어 이번에도 사회문제를 정면으로 그렸다.

'도가니'가 영화로 만들어진다고 했을 때 일각에서는 우려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감독은 관객의 공분을 효과적으로 불러일으키면서 주제의식이 다치지 않게 영화적 재미를 더했다. 공유를 비롯해 조연들과 아역 배우들의 호연도 돋보인다.

'도가니'는 가볍게 볼 수 있는 영화가 아니다. 오히려 참혹하고, 고통스럽다. 그러나 가슴으로 공감한다. 아직 부글부글 끓고 있는 도가니 속의 우리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안함에 사로잡힌다. 가시 없이 태어난 꽃을 지켜주지 못한 죄책감 때문이다.

22일 개봉. 러닝타임 125분. 청소년 관람불가.

김중기 객원기자 filmto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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