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작은 소망 "차라리 내가 아팠으면… "
은지(15'여)는 신발이 한 켤레도 없다. 걸음을 걷지 못하는 은지에게 신발은 사치품이다. 발 크기가 150㎜에 불과할 정도로 성장 속도도 다른 친구들에 비해 느리다. 뇌병변 장애 1급인 은지는 온몸이 마비돼 평생 걸어본 적도, 말을 해본 적도 없다. 엄마 조남순(43) 씨는 "그래도 웃는 모습은 그 누구보다 예쁘다"며 딸을 칭찬했다. 그런 은지가 이제 웃음을 잃었다. 석 달 전 간질과 경련 증세를 보이며 쓰러진 은지는 지금도 병실 문밖을 나서지 못하고 있다.
?엄마의 일기
2011년 9월 16일. 오늘도 새로운 하루가 시작됐다. 은지가 간질로 병원에 입원한 지 벌써 석 달이 다 돼간다. 뇌병변 장애 때문에 전혀 움직일 수 없었던 은지였지만 밥은 잘 먹었는데, 이제 아무것도 삼키지 못한다. 링거액에 의존해 최소한의 영양만 공급받는다. 통통했던 딸의 팔다리는 나뭇가지처럼 앙상해졌다. 종아리가 한 손으로 잡힐 만큼 말라버렸다. 35㎏이었던 은지 몸무게는 병원에 온 뒤 28㎏으로 줄었다.
은지는 내 전부다. 잘 때도 내가 항상 안고 잤다. 말 못하는 은지에게 밤중에 무슨 일이 생길까봐 수시로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우리 모녀는 언어 대신 눈빛과 마음으로 소통했다. 은지 눈빛만 봐도 기분이 어떤지 파악할 수 있을 정도다. 은지의 장애를 알게 된 것은 생후 3개월 때. 태어난 지 100일이 다됐는데 은지는 스스로 목을 가누지 못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찾아간 병원에서 은지는 뇌성마비 진단을 받았다. 스스로 움직일 수 없으니 평생 아기처럼 누워서 살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아들 민성이(20)보다 은지에게 더 많은 사랑과 노력을 쏟았다. 밥을 떠먹이고, 대소변을 처리하고, 잠자리에 눕히고,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아픈 아이를 남편이 함께 보살펴주길 바랐지만 그는 밖으로 겉돌 뿐, 세심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혼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생계를 잇기 위해서 일을 해야 했지만 항상 은지가 마음에 걸렸다. 당시 초등학교 3학년이었던 아들에게 평일 저녁과 주말에 은지를 맡기고 식당에서 설거지 일을 했다. 두 아이를 집에 두고 일터로 향할 때마다 가슴이 찢어졌다. 여태 이렇게 아등바등 살았는데 은지가 더 아파야 한다니. 차라리 내가 아팠으면 좋겠다.
?은지의 일기
2011년 9월 17일. 울 엄마는 나 밖에 모르는 '딸 바보'다. 내가 자다가 조금만 움찔해도 금방 알아차리고 눈을 뜬다. "은지, 어디 아파?" 대답할 수 없는 나는 눈으로 표현한다. '엄마, 괜찮아.' 이렇게 마음속으로 수십 번 외칠 뿐이다.
나는 다섯 살 때까지 젖병에 두유를 넣어 마셨다. 밥을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 몰랐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일상이 나에겐 매번 새로운 도전이었다. 엄마의 노력 덕분에 서서히 두유를 끊고 밥을 먹을 수 있게 됐다.
나는 친구가 딱 세 명 있다. 엄마와 오빠, 그리고 일주일에 두 번 우리 집에 와 책을 읽어주시는 특수학교 선생님. 다른 애들은 중학교 3학년이지만 나는 이제 초등학교 3학년이다. 3년 전 성보학교에 입학했고 움직일 수 없는 나 때문에 선생님이 집에 찾아오셔서 일대일 수업을 해주신다. 나는 그 수업 시간이 정말 좋다.
엄마만큼 민성이 오빠도 나를 잘 챙겨준다. 오빠는 나 때문에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들이랑 제대로 놀지 못했다. 엄마가 일하러 가면 나를 돌보느라 학교 수업이 끝난 뒤 항상 내 옆에 붙어 있었다. 예전에 오빠 오른팔을 베고 자다가 오빠 팔에 침을 잔뜩 흘린 적이 있었다. 그때 오빠는 짜증 한 번 내지 않고 내 얼굴에 묻은 침을 닦아줬다. 우리 오빠는 엄마 다음으로 바보다.
우리 식구는 이사를 할 때도 항상 나를 먼저 생각한다. 엄마는 집을 구할 때 큰 방에 햇빛이 잘 들어오는지, 집주인이 함께 사는지 먼저 확인한다. 바깥에 나갈 수 없는 내게 좁은 방은 볼 수 있는 세상의 전부다. 엄마는 이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창문으로 빛이 잘 들어오는 집을 골라 '밝은 세상'을 만들어 준다. 하루빨리 산소호흡기를 떼고 병원을 벗어나 따스한 햇살이 비치는 우리 집으로 가고 싶다.
?은지네 사정
은지는 지난 6월 25일 열이 42℃까지 오르면서 발작을 일으켜 병원으로 실려왔다. 갑작스런 발작으로 장기가 심각하게 손상돼 한 달 동안 중환자실에서 지냈다. 딸을 간호하기 위해서 조 씨는 3년 전부터 운영해오던 작은 식당을 부동산에 내놨다. 가게 임대료 100만원을 매달 내며 적자를 겨우 면했던 식당이었지만 이제 그것마저 할 수 없게 됐다. 지금 은지네에게 남은 것은 전셋집 보증금 2천만원이 전부다. 조 씨는 기초생활수급자지만 근로능력과 가게가 있어서 생계급여를 전혀 받지 못한다. 은지 앞으로 나오는 장애연금 20만원으로 근근이 살고 있다. 은지가 중환자실에 오래 머무르면서 건강보험 적용이 되지 않는 검사와 치료를 많이 받아 병원비만 1천만원 넘게 나왔다. 이런 상황에서도 조 씨는 "은지가 살아 있어서 다행이다"며 활짝 웃었다.
황수영기자 swimmi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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