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마음의 책] 좋게 본 120년 전 한국 풍경, 반갑고 반가워

입력 2011-09-10 07:41:07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이사벨라 버드 비숍 지음/이인화 옮김/도서출판 살림

1994년 이 책의 초판본 표지에는 '백년 전 한국의 모든 것'이라는 부제가 있다. 책이 나오고 17년이 지났으니, 현재를 시점으로 본다면 거의 '120년 전 한국의 모든 것'이라고 해야겠다.

영국인 이사벨라는 1894년 겨울부터 1897년 봄 사이 한국을 4차례 방문했는데, 이 책은 11개월간에 걸친 현지답사기록이다. 답사문이라고 하지만 단순히 눈에 들어온 것을 그대로 쓴 책은 아니다. 영국 왕립지리학회 최초의 여성회원이었던 이사벨라는 이미 상당한 지식으로 무장하고 있었고, 그 지식을 바탕으로 한국의 현장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이사벨라는 1890년대 조선왕실로부터 최하층의 빈민에 이르기까지 한국인의 삶과 한국이 가졌던 삶의 조건들을 세밀하게 들여다본다. 그녀는 선진국 국민으로서 후진국에 대해 '비판적 시선'을 갖지 않았고, 서구인의 눈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생활풍속에 대해 '신기하다'는 반응을 보이지도 않았다. 시종 담담한 표정으로, 그리고 대체로 호의적인 심정으로, 매우 사려 깊은 눈으로 120년 전 한국을 들여다본다.

한 예로 "한국 국왕이 선의에서 외국의 관리들을 초대하면 그들은 종종 돌아와서 알현도, 경관도, 궁궐도 조롱하곤 했다. 나는 한국 민족의 전통과 예법이 우리와 다르다는 것을 빼고는 조롱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거기에는 단조로움과 점잖음, 상냥함과 정중함, 내게는 무척이나 호감이 가던 예법이 있었다"고 말한다.

이사벨라는 "한국에 대한 연구서를 쓰는 일은 참으로 어렵다. 정확한 조사기록을 가진 참고논저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고 말하는데, 실제로 당시까지 한국의 기록은 왕조중심이었다. 게다가 미국인 혹은 일본인, 러시아인 등이 한국에 관해 쓴 '여행기' '탐사보도문'들(기자가 읽어본 4, 5권의 책은)은 대체로 비판적이거나 혹은 '일본에 곧 삼켜질 운명의 나라' '100년이 지나도 잠에서 깨지 못할 나라'로 묘사하기 일쑤였다.

기록은 중요하다. 어떤 이가 잘 몰라서 혹은 경도된 시선으로 혹은 고의로 왜곡할 경우에도 그 기록은 세월이 지나면서 중요한 자료로 인정되기도 한다. 특히 기록이 드물었던 시대의 일이라면 더욱 그렇다.

'난중일기'를 쓴 이순신 장군과 어떤 글도 남기지 않은 원균이 좋은 예다. 이순신 장군은 명장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장군이 조정의 명령을 어기거나, 얼핏 보기에 장군이 잘못한 것처럼 보이는 사안들이 오늘날 '이해'의 수준을 넘어 '옳음'으로까지 해석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심정을 소상히 밝힌 '난중일기' 덕분이다. 이에 반해 원균은 '기록'을 남기지 않았기에 어떤 '변명'도 할 수 없었다. 원균이 오직 난폭하고, 무지하고, 무능하기만 했을까. 설령 잘못된 판단을 내렸더라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을 텐데, 기록을 남기지 않았기에, 그는 변명할 기회조차 잃어버렸다.

잘못이 있었다면 해명하거나 사과할 수 있다. 그것이 어렵다면 '다시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겠다'고 맹세라도 할 수 있어야 하는데, 기록을 남기지 못하고 떠난 사람과 국가는 그런 기회조차 얻지 못한다. 서구인의 시각, 제국주의 시각의 탐사기가 난무하는 가운데, 이사벨라의 한국답사기는 그래서 반갑고 고맙다. 603쪽

조두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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