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맞이
언제부터 연례행사로 자리 잡게 되었을까, 기억에서도 까마득한 일이 되었다. 해마다 1월 1일이 되면 열일을 제쳐두고 그해 처음으로 떠오르는 태양을 보러 나서는 행렬이 길게 이어진다. 사람들은 매서운 추위도 잊은 채 앞다투어 산으로, 바다로 첫 해돋이를 맞이하러 나선다. 겨울의 한가운데서 칼바람을 맞으며 입속의 치아들은 의지와 상관없이 덜덜 맞부딪히기도 했을 터이다.
나도 몇 해 전까지 해맞이 행사에 참여하지 않으면 시대에 뒤떨어지는 사람이 되는 듯하여 아무 의식 없이도 그 행사에 따라다니곤 했다. 새벽형 인간이 아닌 나는 채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남편 손에 이끌리어 산에도 오르고 해변에 서기도 했다. 북이야, 장구야, 폭죽에 때로는 장내 아나운서까지 동원된 축제의 개막식 같은 해맞이 행사도 경험했다. 물론 한적한 산에 올라 장엄한 첫 태양을 눈에 담았던 소중한 기억도 있다. 그런 해돋이를 마치면 그날은 하루 종일 머리가 무거워서 해야 할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다. 새로운 한 해를 위한 결심을 다지거나 태양의 기운을 받아들이기엔 너무도 떠들썩했다. 추위에 떨었고 인파에 묻혀 마음을 추스를 겨를도 없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붉은 해는 떠올랐고 짧은 환호를 뒤로하고 바쁜 발걸음을 돌렸다.
시작은 언제나 굳은 결의로 요란했다. 희망과 기대가, 들뜬 분위기를 이끌었는지도 모르겠다.
해맞이의 유효기간은 얼마나 될까. 사람마다 다를 터이지만 그리 오래가지는 않을 듯하다.
어린 시절의 방학계획표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직도 시간표라면 둥근 시계모양의 일일생활계획표가 생각이 난다. 욕심을 부려서 쉴 틈도 남기지 않고 무지개색으로 빼곡히 채웠다. 하지만 개학 무렵에는 후회가 그 자리를 대신한 경험이 대부분이었다. 생각해 보면 방학 중간쯤에 첫 결심을 돌아보고 자신을 고쳐 세운 기억은 나지 않는다. 방학이 시작된다는 들뜬 마음이 초능력자가 세울 법한 특급 계획표를 만들게 한 것이었나 보다. 처음부터 되돌아보기는 관심에도 없었던 것 같다.
이제부터라도 해 저물 녘에 겸허해지고자 한다. 노을 앞에서 내 얼굴이 더 붉어 보이지 않도록. 해 질 무렵은 동틀 즈음보다 우리에게 꽤나 긴 시간을 허락한다. 뜨거웠던 자신을 서서히 내려놓고 내일을 기약하게 한다. 처음보다 조금이라도 더 돌아보라고 길게 그림자를 드리운다.
지나온 발자국 없이 새로운 발걸음을 내디딜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나아가기보다 돌아보기를 한다고 하여 앞으로 가지 못할 일은 아닐 듯싶다. 뒷모습이 오히려 앞길을 더 선명하게 해줄 것이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해맞이는 접어두고 노을맞이에 나서려 한다.
이미영(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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