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사랑 산사람] 예산 덕숭산

입력 2011-08-25 13:58:45

'수덕사의 여승' 애절한 선율 따라 에피소드

덕숭산, 그런 산이 있었나? 다소 생소한 산 이름. 이름을 대는 것보다 수덕사 뒷산 하면 일반인들은 금방 알아챈다. 절 이름이 생소한 중년 이상 사람들에게는 '수덕사의 여승' 그 절하면 공감률은 금방 100%로 올라간다.

산은 절에게 묻어가고 절은 대중가요에 빚을 졌으니 물고 물리는 삼각관계가 재미있다. 수덕사를 전국 명소로 데뷔시킨 일등공신은 가수 송춘희였다. "속세에 두고 온 님 잊을 길 없어…." 애절한 목소리로 울려 퍼지는 대중가요는 숱한 남성들의 감성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당시 수덕사엔 한말 신여성 1호 김일엽 스님이 수도 중이어서 세간의 관심은 더했다. 숱한 로맨스로 세간에 오르내렸던 그녀 인지라 노래 가사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심기가 불편했던 그는 직접 방송국을 찾아가 노래를 금지시켜 줄 것을 공식적으로 요청하기도 했다. 이 탓일까. 가수 송춘희는 노래가 히트하는 동안 한 번도 수덕사에 발을 들이지 못했다. 수도도량을 너무 세속화시켰다는 교계의 반발 때문이었다.

◆차령산맥이 서해로 뻗치다 몸을 일으킨 산=수덕사(修德寺), 덕숭산(德崇山), 덕산(德山)온천. 예산엔 3덕(德)이 있다. 덕숭산은 차령산맥이 서해로 뻗어가다 마지막으로 기맥(起脈)한 산. 해발 495m로 높진 않지만 힘찬 산세를 지니고 있다. 정상에 오르면 서해의 섬들이 파노라마로 펼쳐지고 계곡엔 기암기봉이 실루엣으로 일렁인다.

수덕사는 조계종 총림 중 하나인 덕숭총림이다. 송광사, 해인사, 통도사, 백양사와 함께 우리나라 5대 총림을 구성하고 있다. 총림은 선원(禪院), 강원(講院), 율원(律院), 염불원을 갖추어야 비로소 자격을 갖춘다. 경허(鏡虛) 스님과 그 법맥을 이은 만공(滿空) 스님이 이곳에서 선맥을 일으켰다.

예당평야 기슭에 자리 잡은 덕산온천은 우리나라 최고의 수질을 자랑하는 온천. 이곳 유황온천수는 신경통, 만성피부염, 류마티스에 효능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행의 출발은 수덕사 밑 수덕여관. 이곳엔 가수 윤심덕과 함께 한말 3대 신여성으로 불리던 여류문인 김일엽과 화가 나혜석의 자취가 남아있다. 춘원 이광수와의 로맨스로 유명한 일엽은 1933년 38세에 이곳으로 들어와 수도승의 길로 접어들었다.

한국 최초 변호사였던 김우영과의 파경으로 전국적인 화제가 되었던 나혜석도 일엽의 뒤를 이어 불제자가 되기를 원했으나 만공 스님으로부터 "너는 스님이 될 재목이 아니다"라고 거부당하자 수덕여관에 머무르며 그림을 그렸다. 후에 인생유전을 거듭하던 나혜석은 1948년 서울시립자제원 행려병자 병동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당시 나혜석에게서 그림 지도를 받았던 고암 이응로 화백이 1944년 이 여관을 사들였고 1958년 프랑스로 유학을 가기 전까지 이곳에 기거했다.

◆나혜석'일엽 스님'이응로 화백 사연 서린 수덕사=고암(顧庵)은 1967년 동백림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뒤 이곳에서 잠시 머물렀다. 이때 그는 여관 앞 바위에 암각화를 그렸다. 세계의 화단을 넘나들던 대가의 세계인지라 일반인은 그림을 이해하기 힘든 추상 투성이다. 마음속 품은 생각까지 자유롭지 못했던 시절이었으니 그런 울분을 그는 이 그림에 담아 새겼을 것이다.

수덕사로 들어가는 길, 모두 3개의 문과 1개의 루(樓)를 지난다. 이 문들은 모두 승속(僧俗)의 경계. 여행자의 작은 설렘조차 불문에 누(累)가 될까 발걸음이 조심스럽다. 모든 잡귀를 물리친다는 금강문, 사방에서 불법을 외호(外護)한다는 사천왕문을 지나서야 절은 속인(俗人)들의 발걸음을 들인다.

수덕사는 현존하는 유일한 백제 사찰로 백제 법왕 599년에 창건되었다. 1308년 고려 충렬왕 때 세워진 대웅전은 안동 봉정사 극락전,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과 함께 우리나라 대표적인 목조건축물로 꼽힌다. 정면 3칸, 측면 4칸의 맞배지붕구조를 하고 있으며 기둥의 가운데가 불룩한 '배흘림구조'를 하고 있다. 고려시대 건축이면서 백제의 미감이 잘 녹아든 작품으로 특히 공포(包)와 결합된 상량 구조물의 곡선이 아름답다. 그중에서도 소꼬리 모양의 우미량(牛尾樑)은 백미로 꼽힌다.

국보(49호)로까지 지정된 '귀한 몸'이면서도 그 흔한 단청 한 겹 입지 않고 목재의 자연 결을 그대로 노출시켰다. 말 그대로 '쌩얼'이요 '민낯'이다.

◆등산로 따라 견성암'소림초당 이어져=대웅전의 날렵한 추녀선을 카메라에 담고 본격 산행에 나선다. 등산로는 범종각을 끼고 뒤편으로 이어진다. 산길로 접어들자마자 시원한 물줄기가 더위를 걷어간다.

잠시 후 길은 다시 갈라지고 왼쪽으로 오르면 비구니들의 선방이자 일엽스님이 수도했다는 견성암(見性庵)이, 직진하면 만공 선사가 수도한 소림초당이 나온다. 만공 스님은 '텅빈 충만' 이라는 호답게 숱한 기행과 일탈을 일삼았다.

도(道)와 악(樂)의 경계를 넘어 거문고를 즐겨 탔고 서울 부민관에 최승희 춤 구경을 갈 정도로 풍류를 알았다. 만해 한용운을 '내 애인'이라고 부르며 아꼈고 기방(妓房)의 출입에도 거침이 없었다.

등산로는 다시 만공탑, 정혜사로 이어진다. 정혜사 앞마당은 덕숭산 최고의 조망처로 꼽힌다. 비구니 도량인 탓에 출입은 금지된다.

고도를 높인 산길은 조금씩 조망을 열어 보인다. 건너편으로 홍성의 용봉산, 수암산이 초록물결로 일렁이고 서북쪽으로 해미읍이 손에 잡힐 듯 가깝다.

오석(烏石)으로 각자(刻字)한 정상석과 스킨십을 하고 일행은 다시 하산 길로 접어든다.

때마침 수덕사에서 저녁 예불을 알리는 범종 소리가 울려 퍼진다. 저 소리는 한 음악가의 영감을 자극해 대중가요 하나를 탄생시켰다. '수덕사의 여승'에서는 범종을 쇠북으로 표현했고 남자 스님의 예불 의례를 (존재하지도 않은) 여승의 타종으로 둔갑시켰다.

더욱이 수덕사를 '실연한 여인의 도피처'로 묘사함으로써 당시 불교계의 큰 반발을 자초했다. 이 일에 대한 속죄였을까. 가수 송춘희는 '속세의 길'과 결별하고 포교사의 길로 들어섰다.

당시의 관계자들이 가끔씩 그때 일로 화제를 삼아 대화를 나누곤 하는데 하나같이 말한다고 한다.

"그냥 재미있는데 그때는 왜 그랬지?"

글'사진 한상갑기자 arira6@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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