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치매 신약 개발 유인원에 임상실험
프랭크린 J. 샤프너 감독 '혹성탈출'(1968년)의 엔딩은 충격적이었다.
알 수 없는 행성에 불시착한 우주비행사 테일러(찰톤 헤스톤). 그곳은 유인원들이 지배하는 행성이다. 인간은 언어를 잃고 유인원들의 노예로 생활하고 있다.
그들로부터 도망치던 테일러는 해변에서 거대한 구조물을 발견하고 오열한다. 그 구조물은 부서진 자유의 여신상이었다. 그는 이 행성이 미래의 지구라는 것을 깨닫고 "미치광이! 결국 지구를 부숴버렸어. 모두 지옥으로 꺼져!"라고 외친다. 지구 종말을 보여주는 가장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인간의 무분별한 기술개발과 탐욕을 비판한 '혹성탈출' 시리즈는 지난 43년간 총 7편의 시리즈가 제작됐다. 인간과 유인원의 대결이라는 오락적인 요소에 '종의 기원'과 같은 깊은 성찰로 엮어낸 걸작이라는 점에서 여러 차례 리메이크 시도가 있었다. 2001년에는 팀 버튼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지만, 아날로그 분장에서 디지털로 변화됐을 뿐 그 속에 철학적인 의미는 담아내지 못했다.
'혹성탈출:진화의 시작'이 17일 개봉했다. 시리즈의 처음으로 돌아가 인간이 어떻게 유인원의 지배를 받게 됐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아버지(존 리스고)의 치료약 개발을 위해 유인원을 이용한 임상실험에 몰두하던 과학자 윌(제임스 프랭코)은 ALZ-112란 신약을 개발한다. 획기적인 발명이지만 이사회에 발표하던 날 유인원들이 흥분해 날뛰는 바람에 실험이 중단되고, 유인원들은 안락사된다. 윌은 유인원 사이에서 갓 태어난 새끼 시저를 집에 데려와 키운다.
인간을 초월하는 지능을 갖게 된 시저는 어느 날 윌의 아버지를 보호하기 위해 이웃집 남자를 공격했다가 유인원을 보호하는 시설로 보내진다. 그곳에서 자신이 인간과 다른 존재라는 것을 자각한 시저는 다른 유인원들과 함께 인간에 대항할 것을 결심한다.
영국출신 루퍼트 와이어트 감독의 '혹성탈출:진화의 시작'은 들뜨지 않으면서 대단히 정교한 정서로 이야기를 풀어낸다. 간혹 속편들이 흥분해 날뛰는 우를 범하지 않으면서, 유인원 시저가 인간에게 상처받고 반란을 주도하기까지의 서사를 치밀하게 엮어내고 있다.
특히 유인원 시저의 캐릭터를 완성하는데 영화의 전부를 보여주는데, 시원한 블록버스터를 기대한 관객에게는 다소 실망스러울 수도 있지만, 프리퀄(원작 이전의 이야기를 그린 속편)로서는 반드시 거쳐야 할 단계이고, 감독은 인간 이상의 감정을 가진 시저를 통해 잘 그려내고 있다.
창밖을 보면서 자란 시저가 동물보호소 벽에 창을 그려 넣고 조용히 앉아 있는 뒷모습은 처연하면서도 자각의 역동을 여실하게 보여주는 장면이다. 또 탈출시키려고 온 윌의 손에 목줄이 잡혀 있는 것을 보고 쇠창살을 닫고 뒤돌아 앉는 시저의 모습, 보호소를 탈출해 집에서 자고 있는 윌을 지그시 바라보는 모습 등은 유인원 세상을 연 시저의 고뇌가 잘 드러난다.
'혹성탈출:진화의 시작'은 탈옥 스릴러 '이스케피스트'(2008)에 이은 와이어트 감독의 두 번째 장편 연출작이다. 블록버스터 영화에서는 무명에 가까운 신예 감독을 기용한 건 파격에 가깝다.
그러나 와이어트 감독은 68년도 원작과 연결고리를 정교하게 배치하면서 신인답지 않은 연출력을 보여준다. 초반에 실종된 우주선은 1968년 작 테일러의 우주선을, 영화 마지막 바이러스에 감염된 민항기 조종사가 뉴욕행 비행기에 탑승하는 것은 1968년 작에서 해변에 무참히 스러진 자유의 여신상을 연상시켜준다. 또 인류의 종말을 가져오는 바이러스 감염의 발전단계를 엔드 크레딧을 통해 간략하게 보여주는 것 등은 혀를 내두르게 한다.
이 영화에서 뛰어난 것 중 하나는 특수효과다. 유인원 연기자들은 제임스 카메론의 '아바타'와 마찬가지로 전신 캡처 슈트를 입고, 헤드기어를 착용해 표정과 전신연기를 펼쳤다. 특히 '반지의 제왕'에서 골룸 역할을 한 앤디 서키스는 시저 역을 한층 자연스럽게 연기한다. 덕분에 혁명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던 시저의 분노와 고뇌, 처연함 등 심리묘사가 절절하게 다가온다.
과거 시리즈를 기억하고 있는 관객들에게는 의미 있는 프리퀄이지만, 그렇지 않은 젊은 관객들에게는 불친절(?)할 수도 있겠다. 바이러스의 실체 등이 구체적으로 설명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점이 후속편을 기대하게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러닝타임 106분. 12세 관람가.
김중기 객원기자 filmto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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