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환 교수의 세상보기] 일본을 벗어나 세계로 향할 때다

입력 2011-08-13 08:00:00

8월은 우리에게 특별하다. 빼앗긴 나라를 찾고, 대한민국을 만든 시작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식민지의 기억을 되새김하는 의미가 더 크게 와 닿는 8월이다. 올해의 8월은 일본 자민당 의원이 울릉도 방문을 시도하면서 야기된 독도 파문으로 시작됐다. 우리는 그들의 입국 시도를 일본제국주의 침략의 촉수로 받아들였다. 광복절이 있는 8월이기에 더 민감하게 받아들인 것인가.

자민당 의원들이 입국 시도를 하기 며칠 전 나는 일본을 방문했다. 일본에서는 그들의 울릉도 방문이 전혀 화젯거리가 아니었다. 텔레비전이나 신문에도 거의 보도되지 않았으며 내가 만난 사람들도 언급이 없었다. 내가 한국인이기 때문에 언급을 삼간 것이 아니라,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들이 입국하는 8월 1일, 나도 귀국을 했다. 한국은 독도 문제로 전국이 들썩였다. 야당의원 3명이 개인 자격으로 울릉도에 오겠다는데 우리는 전 국민이 궐기했다. 이재오 특임장관은 최후의 진지를 지키듯 독도에서 보초를 서고 있었다. 그들을 막으려면 독도가 아니라 인천공항으로 가는 게 옳지 않겠는가.

 한국의 일본에 대한 대응 방식은 시대가 바뀌어도 왜 변하지 않는 것일까. 혹자는 식민지 지배에 대한 기억으로 인한 열등감 때문이라고 한다. 내면화된 식민지의 기억이 현재와 미래의 일본에 대한 분노가 되어, 그들의 자그만 몸짓에도 전 국민이 일어선다는 것이다. 나비의 단순한 날갯짓이 폭풍우를 만드는 나비효과와 같다. 약자의 질투와 패배자의 시기심, 승자에 대한 원망과 약자의 자기 정당화를 니체는 '르상티망'(ressentiment)이라 했다. 일본에 대한 격정적 반응은 한국인의 르상티망은 아닌가.

한국과 일본의 관계는 식민지 해방 당시와는 비교할 수 없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일본은 새로 패권국의 지위를 넘볼 정도로 전 세계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한국도 그들을 '따라하기'와 '따라잡기'에 바빴다. 일본에만은 져서 안 된다는 강박 관념이 한국 발전의 원동력이 된 측면도 있다. 그 후 일본은 20년 이상 지속되는 경기 침체, 최근의 원전 사고 등으로 위축되고 활기를 잃었다. 국제적으로도 중국에 추월당하고, 한국에 쫓기는 초라한 모습을 보인다. 한국은 식민지를 경험한 나라로서는 유일하게 민주화와 경제성장을 이룩했다. 이 에너지가 한류의 확산으로 나타나고 있다. 일본에 가면 가장 눈에 띄는 것이 TV에 한국 드라마가 연이어 방영되고 있다는 점이다. 산업의 시대에서 문화의 시대로 바뀌었다면, 한국이 일본을 압도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한국은 과거의 식민지 모국을 위협하는 최초의 국가가 된 것이다.

내가 만난 일본 교수는 "이제 일본이 한국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출산율, 이혼율, 자살률뿐입니다"고 했다. 한국의 역동성을 부러워하면서, 사회의 기초가 되는 인구학적 측면에서는 아직 일본은 한국보다 양호하다는 희망을 말하고 싶은 것일 게다. 어쨌든 한국을 바라보는 일본의 시선은 과거와는 판이하게 달라졌다.

이제 한국은 식민지 시대의 기억을 벗고 일본에 대해 자신감 있게 당당해져도 좋지 않을까. 가해자가 반성을 않는데 피해자의 관용을 논하고, 또 일본의 추락을 단정하기는 이른지 모른다. 하지만 피해 의식에 갇혀 일본에 대해 과잉 반응을 하는 것이 우리의 손실을 더 크게 할지도 모른다. 이번 독도 사태에서도 보듯이, 궐기대회를 하거나 장관이 독도 보초를 서는 등 내부적 요란 떨기로 힘을 빼지 말고 차분하게 독도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면서 국제사회에 '한국의 독도'를 알리는 게 효과적일 것이다.

일본의 강제병합으로부터 100년이나 지난 올해부터는 8월의 의미가 달라졌으면 좋겠다. 자학(自虐)적인 식민지의 기억을 걷어내고 일본을 객관화해야 한다. 이제 일본 '따라하기'를 할 필요도 없고, 또 그들을 분노의 대상으로만 여기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들에게 나비효과의 불로소득을 주지 말자. 광복절을 맞아 분노의 각오도 필요하지만, 한국은 이제 일본을 벗어나 더 큰 세계를 향해야 한다.

이성환(계명대학교 교수·국경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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