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살던 고향은] (5)문강명 대표의 경남 고성

입력 2011-07-30 08:00:00

깡도 情도 숭늉 마시며 배웠던 곳…

멱감고 고기잡고 씨름하고 연날리던 추억을 고스란히 간직한 경남 고성 죽계리 하천. 고기 잡는 동네 아이의 모습에 추억이 울컥 밀려와 함께 반두질에 나섰다.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멱감고 고기잡고 씨름하고 연날리던 추억을 고스란히 간직한 경남 고성 죽계리 하천. 고기 잡는 동네 아이의 모습에 추억이 울컥 밀려와 함께 반두질에 나섰다.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동네 쉼터를 지키던 그 느티나무가 어느새 고목으로 자라 무더위를 식혀주는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동네 쉼터를 지키던 그 느티나무가 어느새 고목으로 자라 무더위를 식혀주는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마을 한쪽에 자리잡은 정미소가 아직도 자리를 지키고 있다.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마을 한쪽에 자리잡은 정미소가 아직도 자리를 지키고 있다.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문강명 대표
문강명 대표

어린 시절을 시골에서 보낸 사람에게 '고향'이라는 단어는 가슴이 미어지고 숱한 추억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가게 하는 힘이 있다. 텔레비전은 고사하고 전기도 수도도 없던 그 시절 이야기는 새삼 상념에 젖게 한다. 요즘 학생들에게 보자기에 책과 공책을 싸서 등에 메고 검정 고무신을 신고 학교 다녔다는 이야기를 들려주면 '구식' 또는 '구닥다리 세대'로 취급하기 십상이다. 수업 중에도 거리낌 없이 문자를 주고받는 그 '희한한' 광경을 보며 내 어릴 때는 봉화를 피워 의사 전달을 했다고 하면(물론 지어낸 이야기이지만) 거의 '쥐라기 공원'을 관람하는 눈빛으로 째려본다. 톡 쏘는 콜라처럼 자극적인 문화와 유행에 젖어 있는 젊은 세대들에게 소뒷걸음치는 듯한 느린 아날로그 이야기는 고리타분하고 지겨울 것이다. 그럼에도 내가 자주 우리 학생들에게 내 고향 고성 이야기를 들려주는 까닭은 바쁘고 잿빛인 도시에서 여유롭고 울긋불긋한 그림을 그려서 보여주고 싶기 때문이다.

어른들의 고향 이야기는 서구의 인스턴트 식품에 취해서 살아가는 우리 아이들에게 숭늉의 구수한 향을 전하는 것이다. 그러니 동화 들려주듯 고향 이야기를 자주 들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땅이 있고, 물이 있고, 사람이 있는 그곳의 이야기는 비록 거름 냄새, 풀 냄새로 가득한 것이지만 한국인 전형의 원초의 모습이 꿈틀거리던 이야기이라고 확신한다.

정(情)

직업상 외국인과 자주 대화를 나누는데 한국의 '정'을 설명하기란 참 난감하다. 애면글면 affection 이나 attachment 혹은 warm heart 로 설명하곤 하지만 이것은 우리의 '정'이 아니다. 그런데 외국인들에게 내 어릴 적 경험 두어 가지를 이야기하면 고개를 끄떡이며 이해하는 듯한 표정을 짓곤 한다.

국민학교(초등학교) 2학년 때 고성읍내에서 죽계리라는 조그마한 마을로 이사를 했다. 당시 우리 집에는 감나무가 없었는데 옆집 호기 집에는 감이 주렁주렁 매달려 빨갛게 익어가는 중이었다. 어린 마음에 감을 떨어뜨리려고 돌멩이를 던지고 있었는데 담 너머로 아주머니(나중에 알고 보니 호기 어머니)께서 고개를 내미셨다. 순간 '큰일 났다'하고 걱정을 태산같이 하고 있는데 "야야, 그라모 나무 다친다. 들어와서 묵고 싶은 만큼 따가라" 하시는 게 아닌가. 호기 어머니의 그 말씀은 지금도 내 귀와 가슴을 울린다. 그 말씀은 나를 삭막한 인간이 되지 않도록 붙잡아준 말씀이었다.

내 할머니께서는 음식 솜씨가 아주 좋으셨다. 특히, 할머니의 개떡, 술떡 맛은 온 동네가 다 알았다. 맛있는 것 해달라고 조르는 손자의 간청에 농사일로 바쁜 와중에도 직접 농사지으신 보리로 개떡을 만들어 주시곤 했다. 내가 개떡을 입에 대려고 하면 늘 "야야, 이웃에 먼저 좀 갖다 주어라. 음식은 나나무야 된데이" 라고 말씀하셨다. 떡 먹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았지만 그 심부름의 발걸음은 그렇게 가벼울 수가 없었다. 떡을 받으실 분들의 그 환한 미소를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아이고. 머 이런 것을, 고맙다고 꼭 캐래이" 라고 말씀하시던 이웃 아주머니, 할머니들의 그 함박웃음은, 내 혈관 속에서 시골의 훈훈했던 정이라는 이름으로 맥박치며 흐르고 있다.

경남 고성은 앞으로는 바다, 뒤로는 비옥한 농토가 펼쳐진 고장이다. 일찍이, 이순신 장군께서 왜군과의 전쟁에서 든든한 군량미를 확보할 수 있었던 이유도 고성에서 나오는 농수산물 덕분이었다고 한다. 내 어릴 적 고성 장날이 열리는 날은 온 읍내가 들썩거렸고 수많은 농산물과 수산물이 장을 덮치곤 했다. 고소한 전어회, 무와 초장에 담뿍 버무려서 입맛을 당겼던 병어회, 갖가지 나물과 부침개 등을 생각하면 지금도 침이 고인다. 그중에서도 내가 '고향의 맛'으로 가장 높이 치는 음식이 '빼떼기 죽'이다.

우리 학생들에게 빼떼기 죽을 아느냐고 물으면 아무도 모른다. 그 죽이 남도음식인 이유도 있겠지만 자극과 인스턴트식품이 범람하는 급박한 시대 흐름과 맞지 않는 식품인 까닭이다. 빼떼기 죽을 맛보려면 긴 시간이 필요하다. 주원료인 고구마를 채 썰듯이 썰어서 초가지붕 위에서 바짝 말린 다음, 그 말린 고구마와 팥을 몇 시간이고 푹 고운 다음 찹쌀 새알을 넣어서 먹으면 집안에 가득한 빼떼기 죽 향기만큼이나 그 맛이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저장 시설이 빈약했던 예전에 고구마를 오랫동안 보존하기 위해 조상님들께서 발휘한 지혜가 빼떼기라고 한다.

아파트에서 빼떼기 죽을 만들어 먹어 보지만 할머니가 만들어주셨던 그 맛이 나지 않는다. 내 솜씨가 부족한 면도 있지만 손자를 위한 할머니의 지극 정성이 내게는 없기 때문일 것이다. 빼떼기 죽을 생각할 때마다 할머니가 그립고 고향이 그립다.

락(樂)

다른 시골과 마찬가지로 고성에도 정월 보름달 달집태우기, 단오 씨름대회, 참외서리, 고구마'감자 서리 후 구워먹기, 그네타기, 자치기, 잠자리 잡이(당시의 잠자리채는 거미줄을 이용해서 만들었음), 산토끼 잡이, 연 날리기, 오광대 할아버지들 따라 다니기 등 숱한 놀이가 있었다. 그중에서 내가 가장 즐겼던 놀이는 민물고기 잡이였다. 우리 학생들에게 송사리, 미꾸라지, 붕어 잡던 이야기를 해주면 어느 학생 할 것 없이 모두 신기해하고 재미있어 한다.

요즈음이야 냉장고 문을 열면 먹을거리가 넘쳐 나지만 시골의 하루하루는 배고픈 날들이 참 많았다. 그래서 붕어를 잡을 수 있는 봄이 오면 그렇게 좋았다. 특히 큰 비가 와서 물이 한 번 넘치고 나면 큰물 양옆 사이사이에 큼직한 물웅덩이가 생겼는데 그 물에는 정말 물 반 고기 반 이었다. 동네 아저씨들이 그물로 고기를 쓸어 담는 곳을 피해서 한적한 웅덩이로 가서 도망가다가 지쳐서 돌 밑에서 숨을 헐떡거리는 붕어들을 맨손으로 잡곤 했다. 비늘을 벗기고 큼직큼직하게 썰어서 된장에 찍어 먹으면 끝맛이 그렇게 구수할 수 없었다.

작은 시냇물을 막아놓은 보의 다른 편에는 송사리들이 보를 넘으려고 뛰어오르곤 했다. 한적한 여름, 친구와 함께 친구의 반두를 가지고 송사리 한 양동이 가득 잡을 수 있었다. 그 송사리 절반가량을 마당에 던져 놓으면 닭들이 펄떡거리던 그 송사리를 다 잡아 먹었다.

미꾸라지 잡이는 훨씬 더 재미있었다. 미꾸라지가 많이 사는 논 사이의 도량은 수심 10cm, 폭 30cm 정도의 좁은 농지 수로였다. 하지만 미꾸라지를 잡으러 가면 동네 형들이 "떠들지 마라. 미꾸라지 도망간다"고 했다. 어린 소년은 처음에 이해를 하지 못했다. 그 얕은 수심에 도망갈 고기가 눈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물 앞뒤를 막고 물을 퍼낸 다음 수로의 진흙을 파기 시작하자 진흙 뻘 사이사이에는 미꾸라지가 버글버글 거렸다. 농약과 비료가 만연한 요즈음의 농촌에서는 구경할 수 없는 진기하고 생생한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시골의 하루는 일거리로 가득했고, 농사는 끊임없는 성실과 근면을 요구했다. 어린이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눈 뜨면 학교가기 전에도 소소한 일을 도와야 했다. 가령, 우물가에 가서 몇 양동이의 물을 길러 와야지 밥을 먹을 수 있었다. 방과 후에도 여러 가지 일을 도와야 했다. 어른들의 일이나 아이들의 일이 별 차이가 없을 때도 많았다. 퇴비를 만들기 위해 거름과 짚을 섞으라고 할머니께서 말씀하셨을 때 그 양은 정말 산더미 같았다. 당시에 나는 국민학교(초등학교) 2학년이었다. 그러나 쇠스랑을 부지런히 움직이다 보니 어느 순간에 그 많은 거름과 집이 다 섞였다. 그러면 할머니께서는 "아이고 우리 명아는 얼마나 날랜지. 그걸 그새 다했나!!" 하고 칭찬하셨다. 추수 무렵에는 양동이 하나를 주시며 이삭을 주워 오라고 하셨다. 논바닥을 걸어다니며 반동이 정도 채워오면 할머니께서는 "우리. 명아는 어째 이리 부지런한지!" 그 칭찬 한 말씀에 온 논을 다 뒤지며 한 양동이 가득 채워오곤 했다.

내 회사의 상호에 있는 '깡'이란 단어는 시골의 성실 문화와 할머니의 사랑이 어울려져서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하고 가끔 생각한다. 일거리가 있어서 즐거웠고 일거리가 많아서 행복했던 그 시절을 그리워하며 "깡" 하고 한 번 외쳐보니 극강의 근면함으로 일생을 사셨던 할머니의 얼굴이 떠오른다.

내 인생에 최고 행운은 어린 시절을 시골에서 보냈다는 사실이다. 콘크리트 벽에 둘러싸인 도시에서 계절이 바뀔 때마다 시골에서 즐기고 느꼈던 수많은 놀이와 일과 상념들이 눈을 번쩍 뜨게 하고 미소를 짓게 한다. 지금 내 고향은 여름이 가득할 것이다. 이번 주말에는 아들 녀석을 데리고 아빠의 고향을 구경시켜 주고 싶다.

문깡외국어학원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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