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는 치산계곡을 찾아 시문을 지었고 서민들은 계곡을 따라 고개를 넘으며 숲속에 삶의 흔적을 남겼다. 예로부터 현이었던 영천 신녕 화성리 성환산 자락에는 시문들로 빼곡한 정자 환벽정이 우뚝 솟아있다. 신녕 매양리에는 조선시대 지방역원의 중심이었던 장수역이 있었다. 신녕은 서울을 출발한 조선시대 통신사들이 안동, 의성, 의흥을 거쳐 영천에 가기 전날 머물렀던 곳이다. 통신사들은 신녕의 객사에 머물면서 환벽정에 올라 빼어난 풍광을 노래했다. 신녕에 온 선비들이 치산계곡에서 공산폭포의 비경을 읊는 동안 서민들은 등짐을 지고 산길로 도마재를 넘나들었다.
◆신녕현 동헌자리에 선정비 32기
영천시내에서 화산을 거쳐 신녕 들머리에 도착하면 도로변에 활짝 핀 분홍색 배롱나무꽃이 방문객들을 반겨 맞는다. 왼쪽에는 중앙선 철길을 따라 기차가 철거덕 철거덕 소리를 내며 이곳이 교통 요지임을 알려준다. 신녕역 오른쪽 들녘에는 높이 2.6m, 폭 1m 크기의 선돌이 눈에 들어온다. 전민욱 경북문화관광해설사는 "주민들이 선돌을 항해하는 배 형상인 신녕의 돛대로 신성하게 여겨 잘 보존하고 있다"고 말했다.
신녕 시가지에는 도로를 따라 도시에서 찾기 힘든 찻집이 즐비하다. 신녕 전통시장의 점포수는 70여 개로 금호시장보다 많은 편이며 할매국숫집에는 무싯날에도 사람들이 즐겨 찾는다.
옛 관아 터인 신녕면사무소에 들어서면 양쪽으로 선정비들이 32기나 도열해 있다. 여러 곳에 흩어져 있던 것을 한곳에 옮겨 세웠다. 현감 18기, 군수 4기, 찰방 4기, 관찰사 2기, 암행어사 1기, 이방 1기 등 30기는 판독할 수 있지만 나머지 2기는 알아보기 어렵다.
현감, 군수의 덕을 사모한다는 내용이 많지만 장수역을 관할한 종6품 찰방의 공을 기념하는 비석도 4개나 된다. 관찰사의 구휼이나 암행어사의 강직함을 칭송한 비석도 있지만 크기가 작은 이방 선정비도 눈에 띈다. 신녕에는 면사무소 서남쪽 100m 지점 골목 안쪽과 치산3리 마을 입구 도로 옆에도 현감의 덕을 칭송한 비석이 남아 있다. 하윤조(88) 전 신녕면장은 "선정비의 주요 내용이 현감의 바르고 착한 정치를 기리는 것이지만 수탈을 피하기 위해 부임 이전에 비석부터 세운 경우도 있었다"고 했다.
신녕면사무소는 신녕현의 동헌 자리로 1974년 12월 31일 화재 이후 현대식 건물로 새로 지어졌다. 면사무소 앞뜰 동쪽에는 현감들이 감을 따 먹었다고 하는 '현감 감나무'가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김중하 영천시 문화공보관광과장은 "옛 신녕현은 영천시 화남면 선천리 궤뜰마을에 위치해 있었으나 조선 초 태종 때 현재의 신녕 화성리로 소재지를 옮겼다"고 했다.
◆조선시대 통신사들이 오르던 환벽정
면사무소 뒤에 있는 신녕초등학교 운동장으로 발길을 옮기면 왼쪽 성환산 절벽에 아름다운 환벽정이 한눈에 들어온다. 한여름 녹색 숲속의 환벽정은 마치 한 폭의 한국화 같은 시원한 풍경을 연출한다. 학교 옆으로 흐르는 시내 돌다리를 건너 숲속 계단길을 오르면 온통 시문들로 가득한 육각 정자를 만날 수 있다. 한여름 숲속 그늘에서는 온갖 종류의 매미들이 제철을 만난 듯 울어댄다.
환벽정은 1516년 현감 이고가 대나무 밭 아래 '비벽정'을 지은 데서 비롯된다. 이후 1552년 현감 황준량이 퇴락한 비벽정을 헐고 '죽각'을 세웠다. 임진왜란으로 죽각이 소실돼 1611년 현감 송이창이 정자를 지어 '환벽정'이라고 이름 붙였다.
회재 이언적은 '손잡고 비벽정에 올라 그 아래서 노니니/ 푸르디 푸른 대나무에 눈이 쌓여 수북하네'라고 노래했다. 퇴계 이황은 직접 죽각을 방문해 벼슬아치로서 탐욕을 경계하는 시를 지어 제자 황준량에게 주기도 했다.
의성, 의흥을 거쳐 신녕에 도착한 조선시대 통신사들도 객사에 여장을 풀고 곁에 있는 환벽정에 올랐다.
한태문 부산대 교수는 "신녕에 도착한 조선시대 통신사들이 이전의 사행록을 참고하기 위해 지역의 명소인 환벽정에 오르는 것이 관례였다"고 말했다.
통신사 오윤겸은 1617년 환벽정에서 '하룻밤 속된 생각 맑게 해주니/ 10년 글 읽는 것보다 나아/ 여윌망정 대나무 없이 어찌 살까/ 집을 옮겨 이곳에 살고 싶어라' 라는 시를 남겼다.
◆지방역원의 중심 장수역
학문을 권장하고 탐욕을 경계하기 위해 선현들의 시문을 가득 걸어둔 환벽정을 뒤로 하고 발길을 돌려 매양리 신녕중학교 왼쪽의 찰방길을 따라 마을로 들어가면 장수역의 우물로 사용됐던 관가샘을 볼 수 있다.
조선시대 지방역원의 중심인 장수역이 있었던 곳으로 종 6품 찰방이 역의 운영 및 관리를 맡았다. 이원조 영천시 관광진흥담당은 "매양리 마을사람들의 구전에 따라 2007년 영천시에서 장수역 관가샘을 복원했다"고 말했다.
장수역 찰방은 역리 30인, 지인 20인, 사령 10명, 역노 34명, 비 19명 등 113명을 거느렸다. 또 대마 2필, 중마 2필, 복마(짐 싣는 말) 10필 및 크고 작은 역의 역리 200명과 노비 256명도 관할했다. 영천 청통, 경주 아화, 의흥 우곡, 하양 화양 등 14개 역이 장수역 찰방의 관할 하에 있었다.
포은 정몽주는 장수역에 관한 시에서 '흰 구름은 푸른 산에 있는데/ 나그네는 고향을 떠나네/ 해 저물어 눈과 서리 찬데/ 어찌하여 먼 길을 가는가/ 역 정자에서 밤중에 일어나니/ 닭 우는 소리 크게 들리네/ 내일 아침 앞길 떠나면/ 유연한 회포 금치 못하리/ 친구들은 이미 날로 멀어지니/ 머리를 돌리면 눈물만 흐르네'라고 읊었다.
한학자 정재진(55) 씨는 "당시 영천, 청통, 의흥, 부계 등 신녕을 경유하는 4갈래의 큰길을 모두 장수도로 볼 수 있다"며 "장수역 소재지인 신녕이 국가의 주요 간선도로에 위치한 교통요지였다"고 말했다.
영천 신녕이 예전부터 말의 고장인 것을 알 수 있는 장수역 관가샘을 뒤로 하고 치산계곡으로 가다 보면 부산리 여음고개를 만난다. 고개 오른쪽에 봉수대가 있었다고 봉화재로 불리기도 한다. 고개를 넘어 2㎞ 정도 지나면 오른쪽으로 군위 산성면으로 향하는 길이 나온다. 서울을 출발한 조선시대 통신사들이 안동, 의성, 의흥을 거쳐 신녕 장수역으로 오던 길이다.
갈림길에서 부계방향으로 1㎞쯤 지나 왼쪽 치산계곡으로 가는 길목인 부산2리에 들어서면 멀리 팔공산의 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비오는 날에는 골짜기마다 안개가 하늘로 피어올라 신비감을 더해준다.
1914년 이전에 치산면 소재지였던 부산2리 마을 왼쪽 길을 따라 가다 보면 돌로 쌓은 논둑이 향수를 자극한다. 군데군데 미나리를 재배하는 비닐하우스도 보인다. 들판 중간쯤에 우뚝 선 느티나무가 치산2리 마을 사람들에게 쉼터를 제공하고 있다. 마을 길로 따라가면 나지막한 돌담으로 이어진 정겨운 시골 풍경이 푸근함을 더해 준다.
마을을 지나 치산관광지에 들어서면 캠핑장 조성이 한창이다. 영천시는 연간 14만 명이 찾는 이곳에 캠핑용 트레일러 14대, 공연장, 족구장, 산책로 등을 갖춰 특색 있는 체류형 관광지로 가꿔나가고 있다.
◆서민들이 넘나들던 도마재
치산계곡 입구에서 공산폭포까지 오르는 길은 포장돼 있지만 자동차는 수도사 주차장까지 갈 수 있다. 은해사 말사인 수도사는 신라 진덕여왕 1년(647년)에 자장대사와 원효대사에 의해 창건됐으며 노사나불 괘불탱화가 보물 제1271호로 지정돼 있다. 원래 사찰명은 '금당사'였으며 공산폭포 위쪽에 있었으나 화재로 소실돼 현재 자리로 옮겨졌다.
수도사에서 500m쯤 오르면 치산계곡의 절경을 만날 수 있다. 소나무 숲속의 넓은 암반을 따라 팔공산이 토해낸 흰눈 같은 물이 흘러내려 비취색 소를 이룬다.
이 계곡 옆길을 따라 치산, 군위 산성, 부계 등 인근 마을 사람들이 등짐을 지고 대구로 넘나들었다. 치산 마을사람들은 산나물과 말린 모과를 등에 지고 고개를 넘어 대구 서문시장, 칠성시장, 약령시 등에서 판 뒤 생활용품을 구해왔다고 한다. 치산1리에 사는 김태진(79) 씨는 "신녕에서 하양을 거쳐 대구로 갈 경우 100리이지만 도마재를 넘어 동화사 쪽으로 걸으면 40리에 불과할 정도로 가까워 30년 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고갯길로 다녔다"고 말했다.
계곡 중간에는 팔공산의 봉우리에서 모인 물이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공산폭포의 장관을 볼 수 있다. 치산리 마을사람들은 '치산폭포'나 '수도폭포'라고 부른다. 짙푸른 숲속의 장대한 계곡물이 3단의 낭떠러지로 떨어져 물안개를 뿜어낸다. 높이 30m인 폭포의 총 연장 길이가 60m에 이른다.
절경을 감상하기 위해 예로부터 선비들도 즐겨 찾았다. 퇴계 이황은 제자였던 신녕현감 황준량과 함께 폭포를 찾아 중국의 여산에 비유하며 '새로 솟는 폭포가 빼어나/ 천길 성난 우뢰 같구나/ 평상에 기대어 구경하는 곳에/ 아지랑이 푸르름은 몇 겹이런고'라고 읊었다.
폭포 위의 암반에는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지맥을 끊기 위해 뚫었다고 전해지는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폭포를 지나면 평평한 곳에 등산객들의 쉼터가 보인다. 예전에는 이곳에 주막과 안동 권씨 재실이 있었다고 한다. 고개를 오르내리던 사람들이 주막에서 탁배기를 마시며 피로를 풀었단다.
이곳에서 500m쯤 지나면 도마재와 진불암'동봉으로 향하는 갈림길이 나온다. 왼쪽 계곡을 따라 고개로 향하는 길은 오솔길로 좁은 편이다.
정홍섭(74) 치산1리 이장은 "도마재 가는 길이 지금은 계곡에 깎여나가 좁지만 이전에는 치산은 물론 인근 마을 사람들이 대구로 가기 위해 넘던 한길(대로)이었다"고 말했다.
항상 맑은 물이 흐르는 이 계곡을 10여 차례 건너 산길을 오르면 도마재에 이른다. 치산 마을사람들이 넘나들던 옛길은 문명과 도시의 발달로 흐릿해졌지만 도시인들은 건강을 위해 다시 이 산길을 찾고 있다. 글'사진 영천'민병곤기자 minb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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