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말쯤 '4와 5의 최소공배수는 20'이라는 제목으로, 20년 전인 1992년의 정치상황을 돌이켜 보면 올해와 내년의 정치풍향계를 점쳐볼 수 있다는 글을 쓴 적이 있다. 적어도 여당의 상황만 놓고 보면 판박이다. 정말 너무 비슷하게 돌아가고 있다. 7'4 한나라당 전당대회의 결과 때문이다. 시대적 배경과 주인공만 다르고 줄거리는 같은 작품을 리바이벌하는 것 같다.
1990년 노태우의 민주정의당과 김영삼(YS)의 통일민주당, 김종필(JP)의 신민주공화당은 합당했다. 민주자유당의 탄생이다. 3당 통합의 결과로 218석의 거대여당이 출현한다. 당시 민정계는 125석의 절대 강자였다. 민주계는 민정계의 절반도 안 되는 59석이었고 공화계는 35석에 불과했다.
민자당은 90년 3당 통합 이후 92년 대선 후보 선출 때까지 파워게임으로 살얼음판을 걷는 듯했다. 말이 파워게임이지 민정계와 민주계의 계파싸움으로 날을 새웠다. 민주계는 소수파였고 비주류였지만 YS라는 걸출한 '스타'를 보유하고 있었다. 주류, 다수파였던 민정계는 대신 뚜렷한 대선주자가 없었다. 박태준, 박철언, 이종찬 씨 등이 있었지만 YS와 상대하기에는 힘이 부쳤다. 이 갈등의 뿌리에는 YS에게 대선 후보 자리를 내줄 수 없다는 민정계의 거부감이 자리해 있었다.
그러나 대통령 선거일이 다가올수록 저울의 추는 YS 쪽으로 기울었다. 민정계의 간헐적인 저항과 발버둥 그리고 '이탈'이 있었지만 그 흐름은 끝내 뒤집히지 않았다.
지난 3년간의 일은 다들 잘 아는 대로다. 한나라당은 2008년 18대 총선에서 압승을 거두어 170석의 거대여당이 된다. 친이계 90명, 친박계 50명, 중도 30명 정도였다. 그러나 다수'주류였던 친이계와 소수'비주류였던 친박계는 날마다 으르렁댔다. '박근혜는 안 된다'는 친이계의 거부감이 자리해 있었다. 20년 전에 민정계와 민주계가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다음 대선이 1년 반 앞으로 다가왔다.
소수파인 친박계는 '박근혜'라는 흥행 상품을 갖고 대표 상품을 내놓지 못한 친이계를 압박했다. 20년 전 대세론을 업고 민자당의 주도권을 장악해 나간 YS처럼 박 전 대표도 수적인 열세를 극복하고 대세론의 주인공으로 자리매김을 했다. 물론 민정계처럼 친이계에도 거물들은 많다. 그러나 '박근혜'급은 아직 없다. 이 흐름은 이변이 없는 한 뒤집히지 않을 것이다. 여기까지는 친이계는 민정계를 닮았고 친박계는 민주계를 닮았다.
하지만 20년 전 민주계와 지금의 친박계는 중요한 대목에서 다르다.
민주계에는 최형우, 김덕룡, 서석재 등 당대 최고의 전투력을 가진 맹장들이 있었다. 그 아래 일당백의 전투력을 가진 '전사'들도 수두룩했다. YS를 위해 감옥에도 갔고 악역을 마다하지 않았다. YS 대신 매를 맞았고 맷집도 좋았다. 다수파인 민정계의 포섭을 위해서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었고 다른 계파에 대한 각개격파에 성공했다. 특히 김윤환 전 의원이 민정계 내에서 YS 지지를 이끌어 냄으로써 민정계와의 싸움에서 결정적으로 승부를 가를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배경이 작용한 것이다. 이들 YS 지지 민정계를 '신민주계'라고 했다.
지금 친박계는 어떤가. 좁게는 친이계에 맞서, 넓게는 야당을 제압할 만한 장수다운 장수가 보이지 않는다. '좌장은 없다'고 한 박 전 대표의 말 때문인지 배타성이 강한 친목단체 같다. 그러니 친박계 간판만 내걸고 있을 뿐 '전사'로 나설 인사들은 별로 없다. 박 전 대표 주변을 둘러싼 인물들에게서도 호위 무사 이상의 무게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민주계 맹장들의 '포스'에는 족탈불급(足脫不及)이다. 7'4 전당대회를 통해 유승민이라는 장수가 한 사람 나온 정도다. 이런 진단은 친이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친박계 내부의 자체적인 평가다. 이래서는 이길 수 없다.
또 친이계 내부에서 '신친박계' 선언을 이끌어낼 인사도 없다. 그동안 만들어내지 못했다. 시간이 좀 더 지나면 양상이 달라질 수도 있지만 지금까지 보여 온 친박계의 포용력이나 전투력에 비춰볼 때 가능성이 그리 커 보이지 않는다. 민주계보다 친박계가 너무 약체라는 느낌을 그래서 지울 수 없다.
20년 전 YS의 민주계와 20년이 지난 지금 박근혜의 친박계는 이런 차이가 있다.
이동관(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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