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을 요리하는 의사] 나는 욕하는 환자가 좋다

입력 2011-07-11 07:23:14

"지는 우리나라 대통령 이름 다 아는지 다음에 꼭 물어 볼끼다." 기억이 떨어지는 조 할아버지를 정신과로 의뢰했더니, 치매검사를 했다. 지금의 대통령 이름을 묻는 질문에 대통령의 성(性)인 '이(李)'밖에 답하지 못한 것이 속이 상했다. 폐암인 부인이 먼저 떠나시면, 혼자 사시는 동안 편하시라고 정신과에 의뢰했었는데 오히려 상처만 됐다.

조 할아버지는 78세이며 대장암 환자다. 배에는 인공 항문과 인공 소변 줄이 있고, 항문 근처에는 고름 주머니까지 달려있다. 그러나 옷으로 가리면 암 환자 같지 않을 정도로 자기 관리가 철저했다. 성격이 까칠해서 간병하는 할머니에게 소리도 많이 질렀다. 2년 동안 여러 번 수술을 했는데, 할머니는 혹시 자식들에게 힘이 쓰일까봐 꾹참고 남편의 비위를 맞추었다.

할아버지는 급한 성격 때문에 가족 사이에서도 '왕따'였다. 그런데 며칠 전 할머니가 말기 폐암으로 진단받으며 상황이 변했다. 기침과 호흡 곤란 때문에 할머니가 먼저 입원했다. 숨이 차서 침상 생활만 해야 하는 할머니에 비해 그는 멀쩡했다. 할머니 침대에 서서 한 번씩 잔소리를 했고, 아들과 며느리가 할아버지를 나무라기도 했다.

같은 병실에 말기 암으로 같이 입원한 노(老)부부는 겉으로는 티격태격 했지만, 서로 사랑했다. 한 달쯤 지나 할머니가 호흡곤란이 심하게 왔다. 부인이 말기 폐암으로 진단되는 날, 할아버지는 부인이 먼저 죽고 삼사일 뒤에 따라 죽으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금쪽같은 내 자식이 다른 사람에게 부모 봉양 잘 못해서 그렇다는 손가락질 받을 것 같았다. 여기까지 생각하니 마음이 달라졌다. 그래서 죽어가는 할머니를 마주하고, 그는 억지로 한 술 한 술 밥을 뜨고 있다. 슬픔을 불행으로 연결시키지 않으려는 할아버지의 노력은 '삶 자체가 해탈이다'라는 '납관부일기'의 한 구절을 떠오르게 한다.

말기 췌장암 진단을 받은 이(李) 할머니도 있다. 한평생 종갓집 맏며느리로서 일 하고 참기만 했던 그 할머니는 말기 암을 진단받고부터 짜증도 많이 내시고 심지어 욕까지 했다. 난생 처음 병원에 왔는데 손도 쓸 수 없는 말기였다. 그 뒤로부터 성격이 변했다. "할머니, 힘드시죠?" 하면서 두 손을 꼭 잡으니 나를 쳐다보시고 우셨다. 한평생 참고만 사셨는데, 삶의 끝에서 욕을 잠깐 하는 것이 입원할 정도의 병은 아니다. 항우울제를 처방해 드렸다. 약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2주쯤 뒤에 다시 예전의 인자하신 할머니가 되었다.

분노의 시간도 의미가 있는 하나의 과정일 뿐이다. 자기감정을 드러내는 욕하는 환자가 나는 좋다.

김여환 <대구의료원 호스피스·완화의료센터장>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