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활의 고향의 맛] 가거도, 놀라운 은총 <상>

입력 2011-07-07 14:44:39

바닷고기들의 천국, 낚시꾼들을 유혹하다

가거도를 떠올리니 '지이산'(智異山)이라 쓰고 지리산이라 읽는다'는 이병주의 소설 '지리산'의 첫 구절이 생각난다. 이곳 섬사람들은 소흑산도(小黑山島)라 쓰여 있어도 가거도(可居島)라고 읽는다. 해남사람들도 대흥사를 대둔사로 읽는다. 일제 때 일본사람들이 정한 이름은 '죽어도 쓰기 싫다'는 일종의 지명 개명 거부 운동의 일환인 셈이다.

가거도는 1800년쯤 나주 임씨들이 정착한 후 섬의 경관이 너무 아름다워 가가도(嘉街島 또는 可佳島)로 명명했다. 그러다가 1847년쯤부터 샘물과 생선, 약초가 많아 살아 보니 가히 살 만하다 하여 가거도로 이름을 바꿨다고 한다. 일본의 식민정책 일환으로 행정지명이 변경될 때 소흑산도로 불렸으나 주민들은 소흑산도란 말은 아예 입에 담지 않으려고 한다.

이 섬은 우리나라 최남서단에 위치한 외딴섬이다. 목포에서 직선거리 145㎞, 뱃길로는 126마일(233㎞'승선시간 4시간) 떨어져 있다. 그러나 중국은 불과 80여㎞ 밖이어서 상하이에서 새벽 닭 우는 소리가 들린다고 할 정도이다. 마을이래야 대리 향리 대풍리 등 단 세 개뿐이지만 신안군에서 가장 높은 산인 독실산(639m)을 주산으로 품고 있으니 그야말로 '작은 거인'이란 말은 가거도를 두고 한 말이다. 가거도를 멀리서 보면 바다 복판에 떠있는 일엽편주 같기도 하고 바람 앞의 등불 같기도 하다. 태풍이 가거도를 정면으로 치고 나가면 많은 인력과 엄청난 돈을 들여 쌓아놓은 방파제가 맥없이 무너지고 만다. 태풍피해는 몇 년마다 한 번씩 치르는 해거리 행사지만 주민들은 결코 낙담하는 법이 없다. 무너질 때마다 다시 쌓고쌓아 가히 사람이 살만한 가거도로 일궈간다.

1980년대까지 이곳 주민들은 1천600여 명이었지만 지금은 3분의 1 수준인 500여 명이 섬을 지키며 살아간다. 사람들은 떠나갔지만 고기들은 예나 지금이나 태고의 바다를 그대로 지키고 있다. 가거도는 바닷고기들의 낙원이요, 낚시꾼들의 천국이다. 해마다 겨울이면 돔 중의 돔인 감성돔이 낚시꾼을 유혹하고 여름철에는 어른 팔뚝보다 더 굵은 농어와 돌돔들이 운수 좋은 날은 무더기로 잡히기도 한다.

어릴 적부터 산에 함께 다녔던 친구 몇몇이 모여 점심을 먹는 자리에서 "이번 여름에 어디 먼 바다 쪽으로 한번 나가 보자"는 제의가 불씨가 되어 불과 보름 만에 결실을 보게 됐다. 대원은 8명, 일정은 4박 5일, 행선지는 가거도였다. 대원들의 면면은 평생 산과 물에서 놀고 즐기는 것을 직업처럼 해온 명인 내지 달인에 가까운 친구들이었다. 그 중에는 77에베레스트 원정대의 박상열 등반대장을 비롯하여 스킨스쿠버 강사, 스키 강사, 동굴 탐험가, 난(蘭) 전문가 등이 두루 섞여 있었다.

전문가일수록 별말이 없고 불평도 없다. 새벽 출발시간에 확실한 행선지를 모르는 친구도 배낭을 메고 나와 있었다. "야, 너 어디 가는 줄 알고 나왔노?" "바다 간다메?" 그게 다였다. 우린 목포에서 출발하는 가거도 행 남해 프린스호를 타려고 시간 맞춰 달려갔지만 배는 떠나버린 뒤였다. 예정에 없었던 목포에서의 1박은 유달산 밑에서 잤는지 삼학도에서 잤는지 그건 잘 모르겠다. 그런 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다음날 아침 배에 오르니 낚시 가방을 무겁게 멘 낚시가게 주인이 꾸벅 인사를 한다. 그는 대뜸 "민박집은 정했느냐"고 물었다. 전화로 예약했다니까 당장 취소하고 자기네들이 묵는 곳으로 같이 가잰다. 긴 항해 끝에 멀미기운을 앞세워 선착장에 내리니 물빛은 옥빛이 적절하게 혼합된 수채화 그대로였고 하늘도 바다 색깔을 닮아 가고 있었다.

바닷가 민박집에 도착하니 식탁 위에는 농어회가 굵직굵직하게 썰어져 접시 가득 담겨 있었다. 친구들은 웬 횡잰가 싶어 소주잔 부딪칠 겨를도 없이 회를 입으로 끌어넣기 바빴다. 이렇게 맛있는 자연산 농어회를 실컷 먹을 수 있다니 이건 행운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감사를 드려야 할 '놀라운 은총'(Amazing grace) 그 자체였다.

수필가 9hw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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