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도 이서중학교 '제61주년 6·25 참전 학도병 추모식'

입력 2011-06-27 10:17:48

담임교사와 함께 31명 참전…이젠 3명만 남아 그때를 회상

'25전쟁 61주년을 맞아 청도 이서중학교 학도병으로 전쟁에 참여했던 참전용사와 총동창회 동문들이 교정의 6·25 참전비 앞에서 당시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오른쪽부터 박재욱, 이태희 씨. 청도·노진규기자

청도 이서면 이서중학교 6·25 참전 학도병들은 매년 이맘때쯤 교정의 '6·25 참전비' 앞에 모인다. 백발이 성성한 용사들은 전쟁 당시의 이야기만 나오면 61년 전의 까까머리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들은 이 학교 1회 졸업생으로 모두 32명이 참전했다.

전쟁 당시 숨진 4명에 이어 세월이 지나면서 살아남은 28명도 하나둘씩 세상을 떠났고, 이제 이태희(80·이서면 흥선리), 박재욱(80·이서면 서원리), 박상득(80·이서면 대곡2리) 씨 등 3명만이 남았다. 23일 교정에서 열린 '제61주년 6·25 참전 학도병 추모식'에서 만난 이태희, 박재욱 씨는 밥술을 뜨지 않았다. 몸소 겪은 전쟁의 참혹함을 어떻게든 전하고 싶은 마음뿐인 듯했다.

마을 바깥소식을 거의 들을 수 없던 시절, '쾅, 쾅, 쾅' 하는 창녕 방면의 포성은 정신을 아득하게 했다고 한다. 1950년 8월 21일 젊은 혈기의 동기생 31명과 당시 담임교사를 포함한 32명은 손가락을 벤 피로 입대지원서에 도장을 찍었다. 이태희 씨는 "당시 급우는 40명 정도이었는데 학도병으로 선발되려면 M1 소총을 땅에 끌지 않고 멜 수 있는 친구들만 선발됐다"고 했다.

이들은 군용 트럭 1대에 몸을 싣고 야전공병단 신병교육대(현 대구 수성구 고산동)에 입소했다. 청도 모계중, 풍각중, 경산 자인중 등 중학생 1개대대 병력이 17일간 군사교육을 받고 9월 10일 부대편성을 받았다. 박재욱 씨는 "첫번째로 투입된 곳은 영천 신녕전투로 북한군이 묻어놓은 지뢰를 제거하는 임무를 받았다"며 이후 9월 24일부터 북진을 하기 시작했다고 기억했다. 이후 10월 6일 서울도착, 10월 12일 38선 통과, 11월 11일 평양도착, 11월 22일 평안북도 희천까지 갔지만 중공군의 참전으로 남으로 후퇴해야 했다.이태희 씨는 "밥을 굶으며 후퇴하다 지명을 알 수 없는 면소재지에서 피란민 행렬과 군이 뒤엉키면서 '국군아저씨 살려달라'며 아우성치는 소리가 지금도 선명하다"고 했다.

후퇴 중 벌어진 단양전투에서 아군 1개대대 병력은 주야 5일간 전투하다 인민군을 거의 섬멸했으나 아군도 124명의 전우가 목숨을 잃었다. 이때 문재수, 이승모, 박재규, 박재학 등 중학교 동창 4명도 원통하게 전사했다.

1951년 1월 9일 영천 변두리에 도착해 중대장의 고향 외출 허가로 각 소대장 인솔 하에 집 떠난 지 6개월 만에 3시간동안 부모를 만났다. "부모형제와 동민 모두 만세 부르고 껴안고 난리가 나다보니 순식간에 허락된 3시간이 지나더라. 나와 같은 마을의 이종백은 뛰어서 집으로 가고, 나는 면사무소 자전거를 빌려 가는데도 그 친구가 먼저 도착했지."

이들은 군에서 1년~2년9개월가량 더 복무한 뒤 제대했다. 어느덧 20대 중'후반의 나이로 변해버린 이들 28명은 각자의 살길을 찾아 전국으로 흩어졌다. 명절 때나 잠깐씩 만나던 이들은 1980년 전사한 친구 4명을 기리는 비석을 교정에 세우면서 그때부터 참전용사와 유족 등이 함께하는 추모식을 갖고 있다.

연세가 많아지고 점점 세상을 등지면서 올해부터는 총동창회가 추모식을 맡았다. 이태희 씨는 학교 측에 "우리가 없더라도 전사한 전우 4명의 제사를 간곡히 부탁한다"며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6·25의 교훈과 선배들의 애국정신을 심어주는 일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날 이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이 땅에 자유와 번영이 뿌리내리고 있음을 되새기게 하는 참전용사들의 추모식은 엄숙하게 진행됐다.

청도·노진규기자 jgroh@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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