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우익 혼란기 무고한 희생, 이제라도 원혼 달래야죠"
60여년 전 청도 각북면 삼평리 마을 뒤편에서는 주민들이 경찰과 군인들에게 수시로 끌려가 처형당하는 비극이 있었다. 죄목은 빨치산을 돕고 사상적으로 불순했다는 것. 하지만 주민들은 밤이 되면 산에서 내려와 총부리를 겨눈 빨치산의 위협에 할 수 없이 부역을 했을 뿐이다. 주민들은 좌익이니 우익이니 이데올로기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고 먹고사는 게 급했던 이들이다. 6·25전쟁이 막바지에 달하며 정전협정이 한창이었지만 당시 청도에서는 600~700명(추정)의 민간인들이 억울하게 희생됐다.
그런 희생이 최근 주목받고 있다. 대한불교 조계종 승불사 청호 주지스님이 이달 초 6·25민간인희생자추도사업회를 발족하고 본격적인 추모사업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청호스님은 늦었지만 이제라도 희생된 주민들의 억울함을 달래고 위로하는 것이 도리라고 말했다.
◆"무고한 희생 많았다"
청도에서 가까운 비슬산에는 6·25전쟁이 일어나기 전부터 빨치산이 주둔하고 있었다. 북한이 6·25전쟁 이전부터 남한을 교란시키기 위해 빨치산을 조직화했다는 것. 그렇다 보니 청도 주민들은 6·25전쟁 전후로 빨치산에게 심한 괴롭힘을 당했다. 낮에는 경찰에게 통제를 받지만 밤만 되면 빨치산이 마을로 내려와 위협하면서 부역을 시켰다. 주민들은 통제체계가 낮과 밤이 달라 '이중고'에 시달렸다.
1951년 정전협정이 시작되면서 이곳 마을에는 엄청난 피바람이 몰아쳤다. 총성과 포성은 멈추었지만 주민들은 그보다 더한 고통을 당하게 된다. 이른바 '적색분자'를 색출한다는 사회 분위기가 이곳을 휩쓸면서 무고한 주민들의 희생이 잇따른 것이다. 청호 스님은 "경찰이나 군인들이 빨치산에 의해 부역을 한 20, 30대 사람들은 무차별적으로 잡아서 처형했다"고 말했다.
청도에서 민간인 처형 장소로 알려진 곳은 각북면 삼평리와 매전면 곰티재 등이다. 이곳에서 평생을 산 이병희(80'청도 각북면 삼평1리) 할아버지는 "당시 하룻밤 사이에 6, 7집이 제사를 지낸 적도 있다. 젊은 사람들을 창고에 가둬두고 수시로 끌고 가 즉결 처형을 시켰다"고 말했다. 아침 밥상을 차리는 와중에 남편을 잃은 여성도 있었고 시동생과 논에서 일하다 잡혀가 처형되는 일도 있었다. 구구절절 안타까운 사연들이 많다. 당시 처형된 이들의 자녀는 연좌제에 걸려 제대로 취업도 못하면서 고통의 삶을 보냈다. 후손들에까지 억울함이 대물림된 것이다. 청호 스님은 "자녀는 이곳을 떠나 숨어 살거나 잠적해 사는 경우가 허다했다"고 말했다.
◆이제라도 넋 위로해야
청도 각북면에 온 지 19년이 되었다는 청호 스님은 지역 어르신들로부터 이 같은 이야기를 듣고 5년 전부터 추모사업을 차근차근 준비했다. 지난해 7월에 이와 관련해 정관을 완성해 발의한 데 이어 이달 초 마침내 지역 유지들을 중심으로 한 위원 30명으로 구성된 추모사업위원회를 발족한 것이다. 청호 스님은 "보통 군인이나 경찰의 희생은 끝까지 발굴해 추모하고 보상하는 반면 민간인 희생에 대해서는 관심이 별로 없다. 60여 년이 지난 지금 당시 사건을 규명하기보다는 그들의 억울한 넋을 위로하기 위한 차원에서 이번 사업을 추진하는 것이다"고 말했다.
6·25전쟁 때의 민간인 희생은 한동안 공론화하기가 어려웠다. 바로 연좌제와 보안법 때문이다. 지금은 이런 악법들이 완전히 폐지됐지만 한동안 이것들이 우리 사회에 뿌리박혀 청도에서도 민간인 희생에 대해 이야기조차 꺼낼 수 없었다. 청호스님은 조만간 지역 어르신들을 통해 면밀한 조사를 하고 발굴 사업을 진행할 예정이다. 또 추모비라도 세워 그들을 위로한다는 것. 청호 스님은 "추모를 통해 희생자는 물론, 유족들의 고통도 위로할 것"이라고 했다.
전창훈기자 apolonj@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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