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경북의 정체성 재정립, 통절한 반성에서 출발해야

입력 2011-06-17 07:04:25

김관용 경상북도지사

중세유럽의 기사도(騎士道)는 서양정신을 대표한다. 기사로서 지켜야 했던 윤리, 명예, 충성, 예의, 겸양 등을 덕목으로 하는 기사도 정신은 '귀족으로 정당하게 대접받기 위해서는 명예만큼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과도 그 맥을 같이한다.

봉건제도가 무너지고 중세의 기사는 사라졌지만 여전히 기사도는 서양의 기본정신이자 생활양식이다. 그 옛날 기사도 정신이 남자들, 그리고 기사의 작위를 받은 사람들의 전유물이었다면 현대의 기사도 정신은 남녀노소 누구나 가질 수 있을 만큼 보편적이 되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당장 내가 좀 불편하더라도 장애인 주차 공간에는 절대 주차를 하지 않는 일상의 작은 일에서부터 지난 1982년 포클랜드 전쟁 때 영국 왕실의 앤드루 왕자가 위험을 무릅쓰고 헬기 조종사로 참전했던 일에 이르기까지, 지금도 서양사회 전반을 기사도 정신이 지배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 경북에도 이러한 기사도에 견주어 손색이 없는 역사적 정신이 있다. 신라의 화랑정신(花郞精神)이 대표적이다. 오히려 서양의 기사도보다 화랑도가 시대적으로는 훨씬 앞선다. 화랑의 5계(五戒)도 인간과 자연에 대한 사랑, 인간관계, 신의를 강조하는 덕목들로써 오랫동안 경북인의 중심사상이 되고 행동의 근거가 되어 왔다.

유'불'선 3교를 신라적으로 잘 융합한 화랑정신은 조선의 유교사상과 선비문화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는데, 경북은 이러한 '유교' 사상과 '선비' 문화의 핵심적인 가치를 창출하고 유지해 온 지역이기도 하다. 이후 유교사상은 외세의 침략으로 어려움에 처한 한말에 와서는 혁신유림과 독립운동의 형태로 승화되었으며, 이 시기에 경북은 전국에서 가장 많은 독립유공자를 배출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진보적 사건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는 동학농민운동의 사상적 배경이었던 동학과 조국 근대화의 원동력이었던 근면'자조'협동의 새마을운동이 태동한 곳도 바로 경북이다. 이렇듯 우리 경북은 유구한 역사 속에서 각 시대마다 그 시대가 요구하는 사상과 문화를 주도해 왔다고 감히 자부할 수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는 이러한 역사적인 정신과 전통을 시대의 변천에 따라 발전적으로 계승하고, 시대정신으로 승화하는 일을 소홀히 해 왔다. 오히려 이러한 역사적 우월성과 자존심에 오랫동안 안주하다 보니, 보수적이고 배타적인 모습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서울을 비롯한 외지인들을 만날 때 가장 자주 듣는 말이 '경북은 왜 그렇게 보수적이냐'는 것이다. 최근 우리 경북도가 전문기관에 의뢰한 설문조사에서도 외지인들은 경북인의 가장 부정적 성향으로 '보수성'을 꼽았다. 이렇듯 밖으로 비쳐지는 우리 경북의 모습은 역사적 전통과는 사뭇 다르다.

이제라도 우리의 역사를 관통하는 경북의 정체성을 재정립하고 이를 바탕으로 통합의 에너지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스스로의 반성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과거의 '영광의 향수' 속에 안주해 왔음을 통절하게 자성하고, 명분과 자존심에 집착하여 우리의 노력이 부족했음도 직시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미래에 대한 올바른 답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지난 6월 3일부터 4일간의 일정으로 안동 국학진흥원에서 열린 '경북정체성 국제포럼'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국내는 물론, 중국과 일본, 영국, 네덜란드 등 5개국의 석학들과 지역 유림단체 등 400여 명이 함께한 가운데 다양한 제언과 열띤 토론이 이뤄졌다. 여기서도 공통의 맥은 '역사에서 찾되, 미래지향적으로 승화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안주와 과신에 대한 반성이 선행돼야 하고, 환골탈태의 아픔을 감내해야 한다는 따가운 조언도 있었다.

경북의 정체성을 재정립하는 일. 지금 우리의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모습을 탈피하고, 권위주의와 우월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출발이다. 아울러 이렇게 재정립된 정체성은 도민의 자긍심 고취와 지역의 브랜드 가치 향상으로 연결시켜 미래 발전의 동력으로 만들어 내야 한다.

그래서 우리 경북이 금년부터 '경북의 정체성 확립'을 역점 과제의 하나로 선정하여 적극 추진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경북과 경북인들이 진취적이고 개방적인 본래의 모습을 되찾고 이를 새로운 발전의 동력으로 승화시켜 나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다. 도민들께서도 참주인의 입장에서 거대한 변화의 물결에 능동적으로 동참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바란다.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