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활의 고향의 맛] 속리산 비로샘의 백어

입력 2011-06-09 14:34:18

마음이 넉넉해지고 술맛 당기는 사람 안주가 필요없어

포옥 안기는 사람이 있다. 밥과 술을 함께 먹거나 차 한잔을 앞에 두고 이야기를 나눌 때도 시간이 모자라는 그런 사람이 있다. 가르치려 하지 않는데도 배울 게 있고 무엇을 주지 않았는데도 많은 것을 받은 것처럼 만나기만 하면 마음이 넉넉해지는 그런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은 잘생긴 사람도 아니고 돈이 많은 사람도 아니다. 어느 한 분야에 일가를 이뤘으면서도 잘난 체 아는 체 하지 않는다. 말을 할 땐 낮고 조용하게 이야기한다. 타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어려운 이웃에게 손을 내밀어 일어서게 만든다.

그런 사람은 대체로 술맛 당기는 사람이다. 맛있는 안주가 필요 없다. 어쩌다가 어눌한 말씨로 한 마디씩 뱉는 그 말씀이 곧 안주다. 유머와 위트도 풍부하다. 농담도 진담처럼 들리며 진담도 농담처럼 들린다. 이 세상은 진담 같은 농담으로 가득 차 있다. 정치가 그러하고 종교가 그러하고 남녀 간의 사랑 또한 그러하다.

나는 살아오면서 스승을 갖지 못했다. 내가 마음을 열지 못했으므로 스승이 앉을 자리가 마련되지 못했다. 스승을 모실 정도의 학문적 기초를 닦아두지 못한 것은 모두 내 탓이다. 어느날 속리산 에밀레박물관을 찾았다가 그곳에서 스승을 만났다.

조자용 선생. 그는 우리 것에 푹 빠져 있는 민속학자이자 건축학자였다. 별명이 속리산 도깨비라 불릴 정도로 호랑이와 도깨비 그리고 삼신 사상을 연구하는 하버드 출신의 괴짜였다. 사랑이 눈으로 온다더니 스승은 마음으로 오시는 것 같았다.

그날 밤 선생님을 처음 뵙고 오후 늦게부터 마시기 시작한 술은 늦은 밤까지 이어졌다. 법주사 주차장 부근의 어느 막걸리 집에서 새해 새 아침을 맞았다. 그 집에는 나무 바닥 대신 황토가 깔려 있었는데 세배를 드리겠다며 선생님을 맨땅 위에 앉게 하고 너부죽이 큰절을 올렸다. "그래, 됐어. 우리가 설은 제대로 쇠는 구먼." 선생님은 꽤 흡족해 하셨다.

스승이 되고 제자가 되는 데는 무슨 의식이나 절차가 필요하진 않았다. 밤샘 술을 마신 후 올린 설날 큰절 인사가 선생님과 나를 사제지간으로 묶어 주는 것 같았다. 그 일이 있고 나선 선생님은 나를 구 두목(頭目)이라 불렀고 나는 선생님을 두령(頭領)님이라 불렀다. 선생님이 살아 계실 동안 보내주신 '구 두목에게'란 서신은 오십여 통이 넘었고 때론 사모님(고 김선희 여사)이 쓰신 영문 편지도 여러 통 받았다.

사제의 연이 맺어지고 나서 1년에 몇 차례씩 에밀레박물관을 오르내렸다. 선생님은 손님들에게 내어 놓을 마땅한 술이 없으면 아무도 모르게 길러 온 샘물에 양주를 부어 "속리산의 산열매를 따서 빚은 귀한 술"이라며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아무리 유능한 소믈리에라도 선생님의 '샘물술'의 칵테일 방법은 알아내지 못했다.

선생님의 능청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손님은 밀어닥치고 안주가 없으면 운전기사에게 안주장보기 심부름을 보낸 후 먼저 술부터 권한다. 장롱 안에 있는 청자 대접을 꺼내 "옛 고려 사람들이 만든 청자 그릇으로 술을 마시면 맛이 확실히 달라"하시며 술을 권한다. 손님들은 청자 최면에 걸려 안주가 없다는 생각은 깜빡 잊고 술맛 음미의 늪에 빠지고 만다.

속리산의 하룻밤을 게르(ger'몽골의 가옥)처럼 생긴 에밀레박물관의 초가 움막에서 자고 주말 오후에 대구로 내려가겠단 하직 인사를 올렸다. "벌써 가려고. 다음에 오면 속리산 비로봉 밑에 있는 샘에 가서 등뼈가 훤히 보이는 백어(白魚)를 잡아 구워 먹자고." 선지식 같은 선생님의 허풍스런 제의에는 제대로 된 맞장구를 쳐야 재미가 나는 법. "다음에 올 땐 긴 줄 달린 릴낚시를 가져올까요." "아니야, 괜찮아. 헛간에 그물이 있을 거야."

우린 선문답을 마친 노승과 학승처럼 서로 쳐다보며 빙그레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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