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진의 육상 이야기] 마라톤선수는 모두 영웅이다

입력 2011-05-13 10:01:55

그리스의 마라톤 평야 근처에서 페르시아와 전투를 벌이던 조국의 승전보를 알리려 아테네까지 달려간 병사 페이디피데스(Pheiddippides)는 승리의 소식을 알린 후 숨을 거두었으나 그가 마라톤에서 아테네까지 달린 거리는 마라톤의 뿌리가 되었다. 1896년 아테네올림픽에서 페이디피데스의 전설은 아테네의 마라톤교(橋)에서 올림픽 스타디움까지 40㎞달리기로 다시 태어났다.

마라톤은 전통적으로 올림픽과 세계육상선수권대회의 마지막 경기종목으로 자리 잡고 있는데 그것은 마라톤의 화려한 부활과정에 연유한다. 첫 올림픽을 주최한 그리스는 마지막 날까지 메달을 따지 못했으며 조국에 승리의 영광을 안겨줄 마지막 단 하나의 희망만 남아 있었다. 마라톤교를 출발한 25명의 주자들이 새 단장을 한 고대 파나덴 스타디움의 골인지점으로 향하는 레이스에서 9명의 주자만이 완주하여 골인하였는데, 그 가운데 8명이 그리스인이었다. 그리스 마루시 마을의 집배원이자 군 의장대 출신인 스피리돈 루이스(Spiridon Louis)는 2위 그룹보다 7분 빠른 2시간58분50초의 기록으로 가장 먼저 골인했다. 주최국 국민들을 열광시킨 국가적 영웅 탄생과 함께 마라톤은 화려하게 부활하였다.

그 후 올림픽 마라톤의 우승자는 조국을 지키는 전쟁에서 승리한 영웅처럼 투혼의 화신으로 존경받게 되었다. 일제의 압박으로부터 조국 독립의 화신이 된 손기정, 소련의 박해에 항거하는 민주 투사가 된 체코슬로바키아의 에밀 자토펙(Emil Zatopek), 이른바 적진 이탈리아 수도에서 조국이 받은 설움에 대해 처절한 복수극을 펼친 '맨발의 영웅' 에티오피아의 아베베 비킬라(Abebe Bikila), 일장기를 달고 뛰어야 했던 손기정의 한을 풀어준 바르셀로나 올림픽 '몬주익의 영웅' 황영조 등은 모두 올림픽 마라톤이 낳은 대표적인 영웅들이다.

그렇지만 항상 우승자만이 영웅이 되는 것은 아니다.

1968년 멕시코올림픽에서 마모 월데가 우승하면서 아베베 비킬라와 함께 조국 에티오피아에 올림픽 3연패의 영광을 안기며 결승 테이프를 끊은 지 1시간이 지난 시간, 대부분의 관중이 자리를 떠난 경기장에 마지막으로 들어온 탄자니아의 존 스티븐 아크와리의 다리에는 붕대가 감겨져 있었으며 그 사이로 피가 흐르고 있었다. 경기 도중 넘어져 상처를 입은 그는 마지막까지 사력을 다해 골인하면서 '내 조국은 나에게 경기를 시작하라고 여기 보낸 것이 아니라 끝까지 마치라고 보냈다'고 말하며 자신의 사명을 다할 수 있었음에 행복해했다.

2004년 아테네올림픽 마지막 날 주경기장으로 브라질의 반데를레이 리마는 얼굴을 잔뜩 찡그린 채 힘든 기색이 역력한 모습으로 비록 우승자보다 1분 16초 뒤진 3위로 골인했지만 관중들은 '진정한 우승자'에게 아낌없는 기립박수를 보냈다. 그는 선두로 달리던 37㎞ 지점에서 아일랜드 출신의 종말론 추종자인 한 관중에 의해서 넘어지면서 스테파노 발디니(이탈리아)에게 선두를 내준 뒤 끝내 뒤로 처졌다. 마라톤에서는 한 번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 달리는 것조차 힘들지만 극심한 고통을 극복하고 끝내 절망하지 않으며 투혼의 영웅으로 골인한 것이다. 올림픽 마라톤 사상 초유의 사고로 치유할 수 없는 오점을 남겼지만 전 세계인들로 하여금 마라톤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했다.

기원전 490년 올림픽 평원에서 아테네까지 40여㎞에 이르는 죽음의 레이스를 달렸던 병사 페이디피데스의 투혼을 2천500여 년 만에 리마를 통해 다시 볼 수 있었다. 끝까지 조국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마라톤선수는 모두가 영웅이다.

김기진 계명대 체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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