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 영남대학교 설립에 얽힌 이야기가 나간 뒤, 청구대학의 설립자인 최해청(崔海淸'1905~1977)의 유족으로부터 이의가 있었다. 그렇잖아도 제한된 지면에 못다 쓴 부분이 있어서 아쉬웠던 터라, 그때 당시 지역사회에서 청구대학이 지니고 있던 위상을 감안하여 이야기를 조금 덧붙인다.
청구대학과 대구대학을 합병하여 영남대를 설립하기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그 가운데 청구대학은 1950년 4월 25일, 재단법인으로 인가받아 개교하였다. 그 뒤 설립자인 최해청은 학교의 발전을 위하여 전기수(全基守)를 새로운 재단이사장으로 선임하는 한편, 자신은 재단의 이사 겸 학장으로 취임하였다. 그리하여 1955년 문화동(지금의 노보텔 자리)으로 학교를 이전하며 전성기를 누렸는데, 그 당시 야간대학이던 청구대학은 사정상 고등 학문을 배우지 못한 늦깎이 학생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그러다가 큰 어려움에 맞닥뜨렸다. 학교 경리직원의 부정으로 재정난이 가중되었을 뿐 아니라, 교수들의 인사문제로 교내 갈등이 있었다. 그 와중에 최해청 학장은 1966년 12월 30일 갑자기 소집된 이사회에 불려 나갔고, 그 자리에서 '학장 해임' 처분을 받았다. 뜻밖의 일이었다. 그 충격 때문이었는지 최해청은 칩거에 들어갔고, 이사들이 찾아와 '명예 학장'으로 모시겠다며 사과했으나 마음이 풀리지 않았다. 그 뒤 재단이사장 또한 집을 나가 한동안 실종되었다가 사망 처리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 후 설립자의 아우이자 법대학장이던 최해태가 후임 학장으로 선임되었다. 그는 학교 증축공사에 매진하였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67년 6월 15일, 공사 중이던 건물의 붕괴사고가 일어나 수십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른바 'Y자형' 건축물이 내려앉는 대형 사고였는데, 공사를 발주할 당시에는 3층이었으나 무리하게 5층으로 변경하여 시공하다가 일어난 사고였다.
그 같은 사고 수습을 위한 자구책을 모색하던 과정에서 "박정희 대통령에게 학교를 맡아 달라고 간청하면 맡아주지 않을까" 하는 심재완(沈載完) 교수의 제안이 있었고, 그 일을 교섭할 중개자로 이은상(李殷相'1903~1982) 교수가 적임이라는 데 뜻이 모였다. 그리하여 이은상이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서 장시간 설명한 끝에 승낙을 얻어냈고, 뒤이어 이동녕'김성곤 등 7명의 새로운 이사가 선임되었으며, 새로 구성된 이사진은 사고 수습책으로 학교를 내놓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학교의 장래문제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설립자와는 아무런 논의가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최해청은 "내가 청구대학을 내준 일이 없으므로 영남대는 장물 학교"라면서 우울한 심사를 토로하였을 뿐 아니라, 자초지종을 설명하기 위하여 이효상'김성곤 같은 지인들을 통해 박정희 대통령과의 면담을 청원하였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1967년 말 대구대학도 재정난으로 삼성그룹에 지원을 요청하고 있었다. 그때 당시 삼성그룹의 이병철은 이른바 '사카린 밀수 사건'에 연루되어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그 같은 상황에서 사건 수습책으로 학교의 관리를 군사정부에 위임하였고, 이사로 있던 성상경'최준'이효상 등이 중심이 되어 청구대학과의 합병을 결정하였다. 학교의 설립자인 최준(崔浚'1884~1970)은 경주 최 부잣집의 마지막 부자였는데, 백산(白山) 안희제(安熙濟)와 함께 백산상회를 설립하여 막대한 독립자금을 제공한 것으로 널리 알려졌다. 그 뒤 신학문에 대한 열망으로 전 재산을 내놓는 결단을 하였고, 1947년 대구대학의 설립을 위해 300여 년 동안 12대를 내려오던 만석꾼의 전 재산을 기부하고 무대 뒤로 물러났다.
청구대학과 대구대학은 사립대학이었다. 그러나 대구가 교육도시로서의 면목을 세우는 데 한몫을 했었다. 그러다가 우여곡절 끝에 두 대학이 합병되었고, 뒤이어 영남대가 설립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당시 비서실장이던 이후락(李厚洛'1924~2009)이 실무 역할을 맡았다. 그와 함께 학교의 운영에 관한 대리권도 그에게 맡겼으나, 합병에 따른 두 대학 설립자들의 서운함과 이해관계가 맞물려 얽히고설킨 이야기가 적지 않다. 그러나 더 이상 언급하지 않기로 한다. 이 글을 쓰는 목적이 그때 그 시절을 살지 않았던 사람들을 위해, 오늘날 영남대의 모태는 청구대학과 대구대학이라는 사실과 그 생성과정을 살펴보는 데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용자인 시민들도 지역에 새로운 종합대학이 탄생하는 데 대해 싫어하거나 반대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문화사랑방 허허재 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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