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생각 행복편지] 3900원, 인생을 이야기하다

입력 2011-05-10 15:18:04

얼마 전 파주 출판단지에서 열린 책잔치를 보고 왔습니다. 파주로 들어설 때는 왠지 숙연해집니다. 철책선 너머로 경계 근무를 서고 있는 군인들을 보면서 잊고지냈던 분단의 아픔을 느껴봅니다. 이곳의 북녘 코앞에 임진각이 있습니다. 우리가 보는 책들의 상당수는 이처럼 북한과 가까운 땅에서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몇 년째 파주를 다녀오지만 올해는 발 디딜 틈 없이 붐비는 출판사 부스보다 한적한 곳들을 찾아 다녔습니다. 사람들이 찾지 않아 외로이 꽂혀 있는 책들을 보며 '쟤들도 분명 누군가의 손길을 그리워하고 있을 거야'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돋보기 안경을 낀 할아버지가 한가롭게 문고판을 보는 모습에 반해 들어간 길거리 부스. 소박한 책들이 반겨 맞아줍니다. 동서양 고전에서부터 '어린왕자'에 이르기까지, 주황색 소프트 커버에 재생지 느낌의 종이에 인쇄한 문고판들은 세련미가 없는 디자인이어서 오히려 더 정겨웠습니다.

문득 '젊은이여 인생을 이야기하자'라는 책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책값도 3천900원으로 참 착하더군요. 프랑스의 문필가인 앙드레 모루아(1885~1967)가 만년에 쓴 이 책은 원제가 '어느 젊은이에게 보낸 공개 서한'입니다. 작가는 젊은이들에게 어떻게 인생을 살아야 하는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세계의 부조리를 탄식하는 대신 우리들이 행동하는 한쪽 반경만이라도 개선하도록 시도해 보라는 작가의 말이 자꾸 눈에 와 박혔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세계의 부조리를 탓하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는 세상을 원망합니다. 또한 세상이 자신을 만족시키기 위해 구성되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냉정히 생각해보면 세상은 내가 뜻하는 대로 움직여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모루아는 "세계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호의적인 것도 아니려니와 적의도 품고 있지 않다"고 이야기합니다. 세계는 있는 그대로일 뿐이므로 세계를 변화시키려 하지 말고, 다른 누군가가 세계를 변화시키기를 바라지도 말라고 합니다. 대신 그저 내 삶의 한 부분, 행동하는 한쪽 반경만이라도 개선하라고 말합니다. 책을 읽으면서 세상의 불합리성을 탓하며 내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세상을 원망했던 나 자신의 어리석음을 반성해 보았습니다.

출판사 건물과 부스마다 넘쳐나는 책들을 구경하는 즐거움을 느끼면서 '책이 많다고 해서 좋기만 한 걸까?' 하는 엉뚱한 물음을 스스로 던져보았습니다. 책은 돈만 주면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가장 흔한 물건이 되었다는 생각이 스쳐가더군요. 딱히 필요하지 않은데도 허영심 때문에 사고, 그렇게 '끌려온' 책들은 주인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 뿌연 먼지를 뒤집어쓴 채 책장에서 잠자고 있습니다.

쉽게 사서 빨리 읽는 만큼 사람들의 기억에서 책이 사라지는 속도 또한 빠릅니다. 그런 점에서 조선시대 실학자 이덕무(李德懋'1741~1793)의 책 읽는 자세는 현대인들의 책 대하는 태도를 부끄럽게 만듭니다.

이덕무는 밥 먹는 것보다 굶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 만큼 가난했습니다. 서자로 태어나 물려받은 재산도 없고 신분의 벽에 부딪혀 벼슬도 못 하니 살림을 꾸려갈 녹봉도 받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시장에 나가 장사를 할 수도 없었지요. 관직에 들어서지 못하는 설움과 배고픔을 그는 독서로 달랬습니다. 지인에게서 책을 빌려 몇날며칠을 베껴적어 자기책으로 만들고 어쩌다 책 한 권을 갖게 된 날은 아이처럼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했다 합니다.

'굶주린 때에 책을 읽으면 소리가 훨씬 낭랑해져서 글귀가 잘 다가오고 배고픔도 느끼지 못한다. 날씨가 추울 때 책을 읽으면 그 소리의 기운이 스며들어 떨리는 몸이 진정되고 추위를 잊을 수 있다. 근심걱정으로 마음이 괴로울 때 책을 읽으면 눈과 마음이 책에 집중하면서 천만 가지 근심이 모두 사라진다.(안소영 지음 '책만 보는 바보-이덕무와 그의 벗들 이야기' 중에서)

이덕무의 책읽기는 간절함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나 요즘 사람들의 책읽기에는 그런 간절함이 없어 보입니다. 책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도 갈수록 옅어집니다. 책 냄새를 맡거나 손으로 쓰다듬어 보고, 텍스트를 온몸으로 느끼는 데서 오는 행복한 표정을 좀처럼 만나기 힘듭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축복받은 사람입니다. 내담자의 아픔을 치유해 줄 수 있는 책을 찾아 헤매는 동안 마음껏 책을 볼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도 감사해야 할 일임을 알게 되었으니까요.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 못하는 책에도 눈을 돌릴 줄 아는 아량도 생겼습니다. 저를 방황에서 건져 준 책, 제 스스로가 만들어 놓은 호리병박을 부수고 나올 수 있는 용기를 준 책, 내담자에게 도움이 되는 책을 의외의 장소에서 만나는 경험을 한 덕분입니다.

지금 책장을 한번 둘러보시기 바랍니다. 사놓고 읽지 않은 책이 있다면 그동안 외면했던 것에 사과하고 정성들여 읽어보세요. 외면한 그 책 속에 가슴 '철렁' 하는 감동이, 해결하고 싶은 문제에 대한 답이 들어있을 수도 있습니다.

김은아(영남대 유아교육과 겸임교수·마음문학치료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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