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급 도둑' 부조금 스트레스… 직장인은 괴롭다

입력 2011-05-07 08:15:00

은행에 근무 중인 김모(33) 대리는 달력에 표시된 빨간 동그라미만 보면 가슴이 답답하다. 지난 한 달 동안 각종 경조사를 챙기느라 쓴 부조금만 40만원. 이달에는 조금 줄어들긴 했지만 매달 20만~30만원 정도가 빠져나가다 보니 연간 지출되는 경조사비만 300여만원에 달할 정도다. 여느 직장인 연봉의 10%와 맞먹는 적잖은 금액이다.

아내는 "왜 별로 친하지 않은 사람까지 다 챙기고 다니느냐"며 핀잔을 주지만, 실적에 연연할 수밖에 없는 은행원의 직업상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딴에는 친하다며 고객이 청첩장을 건네는데 외면하기도 쉽잖은 노릇인 것. 김 씨는 "이렇게 뿌린 돈이 언젠가는 예금이나 보험, 펀드 실적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믿을 뿐"이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부조금 스트레스

부조금(扶助金) 스트레스가 도를 넘어서고 있다. 직장인들 사이에서는 '카드명세서보다 무섭다' '세금고지서' '월급 도둑'이라는 우스갯소리를 뛰어넘은 오명을 뒤집어쓴 지 오래다. 돈도 돈이지만 주말에 소비되는 시간까지 합치면 부담은 몇 배로 증가한다. 따스한 봄날, 주말 동안 가족과 함께 여행이라도 다녀오고 싶지만 마치 밀린 빚 독촉하듯 꼬박꼬박 빠지지 않는 예식 쫓아다니느라 올봄도 어영부영 흘려보내고 마는 것이다. 얇아지는 지갑과 함께 가슴도 휑해지는 시기가 바로 이맘때쯤이다.

부조금은 목돈이 들어가는 행사 때 이웃이나 친척끼리 십시일반으로 돈이나 음식, 노동력을 보태 일을 잘 치르도록 돕고 자신이 닥쳤을 때 도움을 받는 풍습이다. 우리의 상부상조(相扶相助) 전통에서 비롯됐다. 하지만 요즘처럼 바쁜 시대에 과거 품앗이처럼 서로 일손을 거들어주는 풍습은 거의 사라졌다. 대신 이를 대체한 것이 바로 '현금 박치기'. 돈의 액수와 얼굴도장 찍는 것으로 관계의 고리가 얽혀드는 것이 경조사를 둘러싼 사회학이다.

봄'가을에 집중되는 예식에서부터, 때를 가리지 않고 날아드는 부음, 게다가 지인들의 돌잔치에 환갑, 칠순까지 챙기려면 빠듯한 월급쟁이 수입으로는 가랑이가 찢어질 수준이다. 그렇다 보니 당연히 남의 경조사에 진심으로 축하와 애도를 보내기보다는 머릿속에 주판알부터 먼저 튕기게 된다. "지난번 내 결혼식 때 이 친구가 축의금을 얼마나 냈었지?" "앞으로 나한테 꽤 도움이 될 법한 사람이니까 미래를 생각해 이 정도는 해 두는 게 좋을 거야." 관계의 경중과 앞으로 내 삶에 미칠 영향력 등을 십분 고려해 배춧잎(1만원권)의 숫자가 정해지게 된다.

언제부턴가는 업무와 관련한 거래선이나 로비 대상자를 챙기는 수단으로 변질된 측면도 있다. 축의금이나 부의금 규모가 상대방에 대한 예우를 보여주는 것으로 잘못 인식돼 한창 사회적으로 활동하는 30, 40대에는 가계에 부담이 갈 정도로 도움될 만한 인사들의 경조사를 챙기게 되는 것. 얼마 전 검찰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경산시 모 과장은 자필문건으로 보이는 남겨진 메모에서 "시장 자녀 결혼식 때 축의금으로 1천만원을 냈다"는 내용을 밝혔다.

◆경조비의 경제학

"낸 만큼 돌려받는다"는 법칙은 경조비에서는 통하지 않는 이야기다. 사람들은 '언젠가는'이라는 전제로 눈물을 머금고 어쩔 수 없이 지출을 감수하지만 사실 돌려받는 금액은 평생 내가 지출한 돈의 3분의 1 수준이나 될까. 30대에 직장생활을 시작하고 80세까지 산다고 가정했을 때 매년 300만~400만원(대략 1억5천만~2억원)을 경조사비로 지출하지만 돌려받을 수 있는 액수는 고작 몇천만원 수준을 넘어서기 힘든 실정인 것.

사실 일가친척의 경우에는 어느 때건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사이이지만, 이해관계로 인해 부조를 했던 대상들은 막상 내가 경조사를 당하면 모른 체하기 십상이다. 신문에 난 화촉이나 부고를 보고 알아서 찾아와준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고서는 막상 연락을 취하기도 낯 뜨겁다.

정작 본인이 현직에서 은퇴한 후 자녀가 결혼을 하거나 상을 당하게 되면 지금껏 투자했던 모든 비용은 공중으로 흩어지고 만다. 최모(64'여) 씨는 요즘 결혼 생각이 없는 삼남매를 보면 울화가 치민다. 평생 갖다바친 축의금이 얼만데 돌려받을 기회조차 생기질 않으니 조바심이 나는 것이다. 최 씨는 "남편이 퇴직하기 전에 첫째라도 결혼시켜 축의금이라도 좀 넉넉히 챙겨보려 그렇게 애를 썼지만 마음같이 안 되더라"며 "아들 둘에 딸까지 죄다 결혼은 나 몰라라 하고 있으니 내가 축의금만 생각하면 화병이 다 날 지경"이라고 푸념한다.

그래서 조모(59) 씨는 차라리 안 주고 안 받는 쪽을 선택했다. 한국의 뒤틀린 부조문화에 대해 자신만이라도 아니라는 목소리를 내고 싶었다는 것. 그는 "몇 년 전만 해도 '그래도 안면이 받혀서…'라며 매주 결혼식장을 뛰어다녔지만 어느 날 문득 '내 남은 생의 주말을 남의 결혼식 찾아다니느라 저당 잡혀 살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 후로 그는 정말 친한 사람이 아니라면 경조사는 과감히 외면한다. 대신 그 역시도 자녀의 결혼식을 최대한 간소하게 치렀다. 친지와 아들의 친구와 회사 동료 정도만 불러 최소한의 하객으로 선을 그은 것. 조 씨는 "한국의 부조는 더 이상 미덕이라고 할 만한 우리의 전통이 아니라 잘못된 악습으로 굳어지는 경향"이라며 "모두가 본전타령만 하면서 이 악순환을 계속할 일이 아니라 이제 누군가는 나서서 이 고리를 끊어내야 하지 않겠느냐"고 지적했다.

◆부조금 책정에도 비결?

'얼마를 넣어야 할까.' 경조사에 참석할 때마다 반복하는 고민이다. 특히 최근에는 5만원권이 등장하면서 부담이 더욱 커졌다. 예전에는 별로 친분관계가 두텁지 않다고 생각하면 3만원을 넣는 경우도 다소 있었지만 5만원권이 등장하면서 왠지 손부끄러운 금액이 되고 만 것. 그렇다고 5만원, 10만원을 넣자니 가계의 구멍이 너무 커진다.

이 때문에 대다수 직장인들이 적용하고 있는 룰 하나가 받은 만큼 돌려준다는 원칙이다. 자신의 경조사 때 상대방이 얼마나 냈는지를 확인한 뒤 꼭 그만큼만 부조를 한다는 것. 이상훈(37) 씨는 "엑셀파일로 이름과 축의금 액수를 적은 파일을 만들어놓으면 검색하기도 편하다"고 했다.

'장소'에 따라 부조금 액수를 다르게 정하는 경우도 있다. 호텔 결혼식이면 10만원을 넣기도 하고, 상대적으로 돈이 덜 드는 웨딩홀 등의 경우에는 5만원 정도로 책정하는 것. 미혼인 김소연(31) 씨는 "요즘은 워낙 예식비가 비싸다 보니 호텔 예식의 경우 1인당 식비가 7만~8만원을 호가하는 경우도 많아서 친구들 사이에서는 '축의금 5만원 낼 거면 안 가는 게 도와주는 것'이라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온다"고 했다.

아예 회사에서 원천공제를 하는 곳까지 있다. 일부 대기업이나 공기업의 경우에는 직장동료의 경조사가 있을 경우 회사 사내망을 통해 자신의 이름과 원하는 부조금 액수를 써 넣으면 월급에서 자동으로 이체해 준다.

혹자는 아예 소신껏 '내 처지에 맞게'를 내세우고 있다. 경산 진량공단의 한 업체에 근무하는 이모(43) 씨는 "다들 5만원을 부조한다고 덩달아 그 액수에 맞추다 보면 정말 생활이 곤란해질 정도"라며 "체면치레보다는 내가 살고 봐야 하니 조금 낯 뜨겁더라도 부조금 액수는 3만원으로 정해놓고 살고 있다"고 했다.

한윤조기자 cgdream@msne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