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재의 행복칼럼] 간 큰 할멈

입력 2011-05-07 07:50:00

대구적십자병원에 근무할 때 이야기다. 병원 서쪽 담벼락 아래, 구두닦이와 과일장수 할머니들이 있었다. 구두닦이들은 B.B.S라는 단체에 등록돼 영업 허가가 난 상태였지만 담장 주인인 내게는 허락을 받지않았고 사용료도 없었다. 구두 한 번 공짜로 닦아주지도 않았다. 어떨 땐 미워서 일부러 길 가다 험악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 사람들이 원래 째려보기, 노려보기, 비웃기 등의 표정 짓기는 이력이 난 사람들이라 번번이 나만 꼬리를 내렸다. 과일 노점상 할멈 두 명도 본체만체하기는 마찬가지. 하긴 이 사람들이 나를 좋아할 이유는 없다. 더구나 아무리 속으로라지만 자신들을 '구두닦이'나 '할멈'이라고 호칭하는 몰상식한 사람이 나 말고 누가 있겠는가. '구두미화원', '어르신'이라고 깍듯이 인사해도 고개 숙이는 각도가 덜 꺾였다고 언짢아 할 판인데.

이렇게 비우호적인 이웃들이 어느 날 밤 모두 행복해 한 날이 있었다. 한 멍청한 단체에서 강의를 청해서 갔다가 쥐꼬리 만한 강의료를 받아 병원으로 돌아왔다. 강의료는 적었지만 강의 실력에 딱 맞는 돈이어서 흡족했다. 담장을 돌다가 두 할멈들이 해가 졌는데도 불을 켜놓고 과일 파는 모습을 봤다. 구두닦이들도 손님이 없이 오막살이에 앉아 잡담을 하고 있었다.

할머니들이 측은했다. 바나나 값을 물으니 5천원이란다. 어제 똑같은 바나나를 마트에서 3천원에 샀던 터라 속으로 '이 할망구들 순 도둑이야!'라고 외쳤다. 하지만 교활하게도 난 "아유, 바나나 값이 참 싸기도 하네"라고 했다. 그러자 더 교활한 그녀들은 "에이, 밑지고도 파는 거지요. 더구나 원장님이신데"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아마 속으론 '값도 모르는 멍청이. 원장이니까 덤터기 써도 돼'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 날은 이상하게 표정 관리가 잘 됐다. 굉장히 고마운 척하며 바나나를 샀다.

그리고 옆자리 구두닦이 오막살이로 갔다. "아이고, 사장님들 안녕하세요? 시장할 텐데 이거 좀 드세요"라며 건넸다. 예상 밖으로 그들은 함박웃음을 웃으며 바나나를 받았다. '이 병신아. 넌 참 헛 똑똑이야. 교활한 할망구들에게 덤터기나 쓰고'라고 속으로 비웃는 듯 했다. 하지만 난 아무 소리도 느끼지 못한 것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그 두 무리들에게 굽신굽신했다.

그날 밤 담벼락을 떠나며 구두닦이들과 할멈들과 나 세 무리는 한동안 크게 웃었다. 행복에 겨운 웃음이었다. 나 하나가 시체가 되니 많은 하이에나들이 뜯어먹으며 기뻐했다. 집에 오면서 나는 생각했다. "왜 내가 진작 이렇게 하이에나가 될 생각은 하지 않고 사자처럼 으르렁거리며 살았을까?"라고. 아마 그날 밤은 달도 우리를 보고 웃었을 것이다.

권영재 보람병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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