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속도'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브랜드가 되었다. 50여 년의 짧은 도시화, 산업화 기간 동안 우리나라가 이룩한 발전의 속도뿐만 아니라 탁월한 통신 인프라를 활용한 정보 처리 속도, 한국인들의 신속한 일 처리 능력이 그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젠 웬만한 외국인들도 '빨리빨리'라는 한국말은 알게 되었다. 빠른 속도를 핵심적인 경쟁력 요소로 삼는 우리나라 상품들이 세계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이미 대표적인 수출 상품이 되어버린 한국형 신도시가 지니는 매력은 첨단도시 디자인과 시공 능력 외에도 개발 속도가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탁월한 정보 처리 능력을 갖춘 메모리 반도체나 휴대폰은 세계시장을 석권하고 있다.
그러기에 그동안 속도는 대부분 긍정적인 의미로만 받아들여져 왔다. '속도가 붙고 있다' '속도를 내고 있다'는 표현은 일이 잘 추진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가속이 붙었다'고 하면 더욱 잘 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본의 회전 속도가 빨라지면 이윤율이 높아지고, 개발사업의 추진 속도가 빨라지면 사업 비용이 절감된다. 개발업자들은 개발사업의 속도를 높이기 위해 개발사업의 평가, 심의, 의견 개진의 기회를 생략하거나 간소화하도록 요구하고, 정부는 이를 제도화한다. 규제 완화 주장의 본질은 사업 추진 속도를 높여 효율성을 제고하자는 데 있다.
그러나 빠른 속도는 시간을 절약해 주지만 과속의 부작용을 낳기 마련이다. 자동차의 주행 속도가 빨라지면 운전자의 시야가 좁아지듯이, 개발의 속도가 빨라지면 사업자가 주변 여건이나 주민들을 고려할 여유를 갖지 못한다. 속도를 높여 사업 비용을 절감하려는 사업자에게 지역의 역사와 문화, 환경은 사업을 지연시키는 거추장스러운 장애물일 뿐이다. 속도를 중시하는 사업자는 주민을 포함한 이해관계자들의 참여를 사업의 추진 속도를 늦추고 사업 비용을 키우는 불편한 절차로 인식한다. 빨리 철거하고 주민들을 빨리 내쫓을수록 사업 비용이 절감되기 때문이다.
속도를 중시하는 개발사업에서는 먹튀가 판을 칠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의 개발사업은 대부분 분양 후 청산하는 구조로 추진된다. 신도시를 건설하는 LH공사나 지방개발공사는 건설 후 분양하고 기반시설을 지자체에 인계하는 것으로 역할을 끝낸다. 도시의 관리와 운영까지 책임지는 영국의 신도시 개발공사와 다른 점이다. 우리나라에서 재정비사업을 추진하는 재개발조합과 재건축조합은 자산을 한데 모아 재정비사업을 벌인 후 발생하는 이익을 재배분하는 부동산 투자조합일 뿐이다. 주민들과 지자체가 함께 구성원이 되어 개발 후에도 지역사회와 임대주택을 관리운영하는 영국의 주택협회(Housing Association)나 독일의 주택조합과 다르다. 우리나라 건설회사들은 주택이나 빌딩을 건설하고 분양해서 수익을 챙긴다는 점에서 부동산을 개발한 후에 관리운영하는 일본의 모리빌딩이나 미쓰이부동산 같은 부동산회사와 수익구조가 다르다. 우리나라의 개발주체들은 모두가 개발사업에서 발생하는 개발 이익만 얻으면 떠나버리는 먹튀들일 뿐이다.
최근 과속 개발이 사회적인 문제가 되고 있다. 단군 이래 최대 금액이 투자되는 4대강 사업은 완공 기간을 2012년으로, 대부분의 공사를 금년 말로 설정하여 속도전식 공사를 유도하고 있다. 수십만 년 동안 쌓인 강변의 퇴적토는 농지 리모델링이란 이름으로 인근 농지로 옮겨지고 있다. 동절기와 홍수기 공사와 밤샘작업으로 지난 2009년 11월 착공 이후 20명의 노동자들이 죽음으로 내몰리게 되었다.
전국에 걸쳐 76개의 재정비촉진지구가 지정된 뉴타운 사업에 대해 주민들의 사업 중단과 지구 지정 해제 요구가 빗발치고 있다. 전국에서 지정된 뉴타운사업의 면적은 여의도 면적의 90배가 넘는 7천940만㎡에 이른다. 뉴타운사업의 과속 개발은 2006∼2008년간 서울의 강북지역에서 해당지역과 주변지역의 주택가격과 전세가격을 폭등시키고 원주민들을 내쫓는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었다. 그럼에도 국회에는 뉴타운사업을 촉진하기 위해 규제 완화와 정부의 재정 지원 확대를 위한 법률 개정안이 상정되어 있다.
독일 사회학자 페터 보르샤이트는 '템포 바이러스'란 책에서 속도를 줄이려는 인간의 노력이 문명을 어떻게 발전시켜 왔는지를 분석하고 있다. 그러나 속도를 높여 시간을 줄이려는 노력은 결코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으며 오히려 부담이 될 수 있음을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다. 이 책에서 인용한 소설 속의 주인공의 말은 이 책의 주장을 잘 압축하고 있다. "시간은 삶이다. … 그래서 사람들은 시간을 절약하면 할수록 그것을 더 조금만 갖게 된다."
이제 우리나라 개발에서 속도는 더 이상 미덕이 아니라 우리의 국토와 도시를 황폐화시키는 주범임을 인식해야 한다. 또한 개발사업에서 시간은 단순히 비용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기 위해 함께 논의하고 고민하는 기회로 인식해야 한다.
변창흠(세종대 행정학과 교수)
댓글 많은 뉴스
문재인 "정치탄압"…뇌물죄 수사검사 공수처에 고발
이준석, 전장연 성당 시위에 "사회적 약자 프레임 악용한 집단 이기주의"
[전문] 한덕수, 대선 출마 "임기 3년으로 단축…개헌 완료 후 퇴임"
대법, 이재명 '선거법 위반' 파기환송…"골프발언, 허위사실공표"
민주당 "李 유죄 판단 대법관 10명 탄핵하자"…국힘 "이성 잃었다"